4.3 평화공원을 찾아서..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유홍준 교수의 표현대로 대한민국에 아름다운 제주도가 없다면 상당히 허전 할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이 아름다운 섬을 말 그대로 피로 물들였다. 70주년을 맞이한 ‘4.3’을 취재하기 위해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제주공항에 착륙하기 직전, 어김없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는데, 물론 안전이나 탈출 교육 등 의례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4.3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해달라는 멘트로 마무리되어 살짝 놀랐다. 제주도 땅을 밟기도 전에 ‘4.3’ 70주년을 맞이하는 제주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했다. 공항에서 4.3 평화기념관으로 가는 길에는 `제주4.3희생 추념식`을 알리는 현수막과 대형 아치, 홍보탑이 곳곳에서 눈에 띄였다.

 

한국 현대사가 일제의 지배, 분단과 전쟁, 독재로 얼룩졌다는 사실은 역사에 밝지 않은 이들도 잘 알고 있다. 특히 4.19와 5.18은 수 백 명 단위의 희생자를 냈다. 하지만 이와는 비교 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자가 나온 곳은 4.3시기의 제주도였다. 혁명도 봉기도 항쟁도 아니고 사태도 아닌 그냥 4.3으로만 불리우는 이 ‘사건’으로 죽은 이는 확인된 바만 헤아려도 10955명에 달한다.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 명에서 최대 8만 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오늘날도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 치러진다니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럽게 온 해방은 온 민족을 기쁘게 했지만 제주도민에게는 더 남다르게 다가왔다. 본토 결전을 앞둔 일제는 인구 22만의 제주도에 무려 7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요새화를 추진하면서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이 없었다면 제주도는 제2의 오키나와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제주도민에게 8.15해방은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죽음으로의 해방’을 의미했던 것이다. 하지만 참극은 단지 3년 늦게 왔을 뿐이었고, 그것도 동족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 비극적이었다. 

해방 후, 제주도는 특유의 공동체 의식을 발휘하여 좌우익이 모두 참여한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주민자치를 실현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실정, 재일 도민들의 대거 귀국으로 인한 식량난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뭍에서 온 ‘낙하산’들의 무지와 오만도 문제를 키웠고,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1947년 3월 1일, 제주 북 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렸고, 3만에 가까운 주민이 모였고,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 부근을 지나가던 중 사건이 터졌다. 관덕정은 제주도의 광화문 같은 상징적인 장소이다. 기마경찰이 탄 말에 아이가 말굽에 채었는데 이를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 군중들은 돌을 던졌다. 그러자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묘하게도 하루 전인 2월 28일, 대만에서는 2.28 항쟁이 일어났다. 세계대전과 냉전체제는 한중일 3개국의 변방, 제주도와 대만, 오키나와를 피로 물들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민심은 크게 흔들렸고,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사상 유례 없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노동자, 학생들이 모두 참가했고,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이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66개 기관, 41,211명이 대파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런 요구를 모두 무시해버렸다.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노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레드 아일랜드’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말 대로 제주도는 ‘레드 아일랜드’가 되었다. 그들이 지른 불과 도민들의 피로 말이다. 

미군정은 협상을 하지 않고 총파업 와해에 몰두했다.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적극적으로 탄압하자 총파업은 3월 말부터는 가라앉았다. 하지만 육지에서 온 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은 파업 참여자들을 계속해서 검거했고,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8년 4월까지 무려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을 정도였다. 그리고 20대 젊은이 3명이 잇달아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당연히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물론 이 정도의 상황도 몇 달 후 일어날 비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만 말이다. 그 과정에서 지속적인 탄압을 받던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결정하였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 곧 350여 명의 무장대가 도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소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5.10 총선거, 한 달 전이라 군과 경찰은 민감하게 반응했고, 무장대는 기를 쓰고 선거를 방해하고자 했다. 반면 군경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를 성사시키고자 했다. 결국 미군정과 군경의 투표 독려에도 불구하고 제주읍 중심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선거는 과반 미만의 투표로 무효가 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석 달 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1948년 10월 17일, 신임 사령관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게는 거주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다음 날부터 해안은 완전히 봉쇄되었고, 군경은 산악지역을 적지로 간주했다. 탄압과 만행은 여순사건이후로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켰다. 바로 작전이 실행되었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대상이었다. 토벌대는 산간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하고 마을에 불을 질러 초토화 시켰다. 95%의 중산간 마을이 사라졌고,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참상이 벌어졌다. 무장대의 만행도 같이 일어나면서 어마어마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제주시 봉개동에 자리 잡고 있는 4.3평화공원의 기념관에 가면 그 참상을 잘 느낄 수 있다. 위령제단에 안치된 위패를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 수 있는데, 그 순간 전율이 온 몸을 감싼다. 대부분의 사망자는 대토벌작전이 벌어졌던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에 발생했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 이자 학살터 였다.” 제주 4.3 평화공원 내 기념관에 있는 문구이다. 

토벌대의 만행은 1949년 3월, 유재흥이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는 선무공작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산에 있던 피난민들에게 "하산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며 하산을 종용했다. 그리하여 4월부터 귀순자들이 속속 나타났고, 5월까지 수천여 명이 귀순했다. 하지만 하산자 중 1600여 명은 전국의 교도소에 분산되어 수용되고 말았다. 이런 초토화 작전과 선무공작은 무장대를 거의 끝장냈다. 그럼에도 무장대는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의 지원이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 게릴라전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무장대원이 검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4.3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전국에서는 좌익 정치범이나 좌익 혐의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의심만으로 미리 구속시키는 예비검속 그리고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때 4.3관련 구속자들은 거의 목숨을 잃었다. 4.3평화공원은 행방불명자비원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두어 이들을 기리고 있다. 이곳에 설치된 희생자 표석만도 3,895개에 달한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제주도는 어느 정도 안정 되었다. 하지만 후유증은 엄청났고, 무려 반세기 동안 유족들은 사회생활에 있어 갖가지 제약을 받았다. 일본으로 떠난 주민들도 많았다. 1980년대가 되어서야 용감한 문인들에 의해 4.3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민주화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 더 활발해졌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2000년에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사건 55년 만에 최초로 국가원수로서 첫 사과를 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또한 2006년에는 직접 제주를 방문하여 58주기 행사를 치르며 거듭 사과하였다. 2014년에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추념이라는 표현은 ‘4.3’처럼 뭔 가 하다가 만 느낌을 강하게 들게 만들지만 말이다. 지금의 평화공원은 2008년에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역사를 담는 그릇을 모티브로 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실 현재에도 4.3은 5.18 민주화운동, 부마항쟁, 4.19혁명, 6월 항쟁 등과 비교해 보면, 인지도가 낮고, 공교육 과정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다른 민중항쟁과 달리 4.3을 민중항쟁으로 선뜻 떠올리는 국민도 많지 않다. 하지만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2017년 4월 8일에 `제주 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하였고, 10월 17일에는 제주 4.3 관련 유관단체들은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학살 당시부터 침묵해 온 미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자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UN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 중 제주도에 갈 경우, 반드시 평화공원을 방문했으면 하는 당부와 함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사 중 일부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제주도민 여러분,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보배입니다.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인이 사랑하는 평화의 섬, 번영의 섬으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주도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도민 여러분은 폐허를 딛고 아름다운 섬을 재건해냈고, 어느 지역보다 높은 자치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민 스스로 결의해서 항상 중앙정부가 기대하는 이상의 높은 성과를 이루어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앞장서 나아가는 만큼 정부도 열심히 성원하고 힘껏 밀어드리겠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풍요롭고 활력 넘치는 제주를 만들어 나갑시다. 이 평화의 섬을 통해 한국과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행사를 지켜보면서 엄청난 고통과 분노가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켜 볼 수 있는 역사가 되고, 역사의 마당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보면서 수십 년이 흐르면 이게 제주도의 새로운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 모든 국민들에게 분노와 불신과 증오가 아닌, 사랑과 믿음, 화해를 가리켜주는 그런 중요한 상징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됐습니다. 함께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