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충북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청주 성안길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청주 성안길, 민주주의 ‘핫플레이스’

한국의 민주화운동 유적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서울, 부산, 마산, 광주 등을 떠올린다. 충청도는 특유의 느긋한 이미지 때문인지 어딘가 힘이 약해 보인다. 더구나 충청북도는 17개 광역단체 중 인구가 작고, 오랫동안 지녔던 보수적 분위기가 있어 ‘화끈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충청북도가 일어나면 승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결론도 나올 수 있다.

청주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이 나오는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이다. 하지만 충청 병마절도사 영문과 당간지주 정도를 제외하면 도심의 명승고적은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청주시민들은 일제 강점기에 사라진 읍성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헐려버린 성벽의 흔적은 청주 도시 구조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옛 북문 터에서 남문 터에 이르는 성안길 때문이다. 조선 시대부터 읍성과 시장이 있었던 곳이지만 도청과 시청이 바로 옆에 자리 잡으면서 청주, 아니 충북 제일의 번화가로 자리 잡았다.

현재의 청주는 국제공항을 가지고 있고 도청소재지이자 충청북도 도세의 절반 이상을 가진 ‘준광역시’라고 볼 수 있지만, 신도심을 만들어 도시의 중추 기능을 이전한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도청과 시청을 구도심에 그대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시위를 하고자 하는 민주 세력에게 성안길과 그 주변은 시위의 주요 목표인 관공서, 그리고 많은 시민이 모이는 상업공간이 있는 최적의 공간일 수밖에 없었다. 청주 민주화운동의 선봉인 충북대와 청주대는 성안길의 서쪽과 북쪽에 위치해 있고, 충북대가 더 멀기는 하지만 성안길에서 합류하여 싸울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시위에 나선 충북대학생들은 도서관 옆 잔디밭에서 집회를 가진 후 성안길로 ‘진격’했다. 충북대생들은 성안길에 가기 직전에 걸려있는 청주대교를 건너야 했지만 이 다리는 당연하게도 경찰에 의해 막혀있기에 무심천을 물 쪽으로 건너는 ‘도강투쟁’을 감행했다고 한다.

더구나 청주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근거지인 청주제일교회도 시장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도 6월 항쟁 20주년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면 이런 ‘천혜’의 조건을 갖춘 청주 성안길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을까?

성안길 시위의 본격적인 시작은 80년 5월부터 시작되었다. 전두환의 신군부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학생들은 성안길로 진격했다. 80년 5월 민주 투쟁 당시에도 충북대, 청주대 청주사대 학생들이 성안길을 뒤덮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폭압 가운데서 몇 년의 침묵이 이어졌고, 84년부터 성안길의 길거리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최종철 열사다.

80년 5월 민주 투쟁에서 앞장섰던 최종철 열사는 청주 출신으로 부산대로 진학하여 부마항쟁에 참여하고, 5.17 이후 구속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1981년 5월 가석방된 후 9월 1일,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청주의 민주인사들은 1984년 11월 14일 용박골 제일교회 묘역에 추모비 제막식을 마치고 성안길에서 거리 시위를 벌이며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이것이 2016년 촛불 혁명까지 이어지는 성안길 시위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던 것이다. 훗날 최 열사는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고, 유해는 망월동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86년 4월 신민당과 재야가 함께한 개헌 현판식 투쟁에서도 투쟁의 중심은 성안길이었고, 거리는 투석과 최루탄으로 뜨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를 거치면서 민주화운동 세력은 대오를 정비하면서 5월 27일,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을 구성하고 전두환 정권과의 정면 대결에 나섰다. 충북 지역에서도 5월 15일, 국본의 지부가 결성되었다. 21일 ‘호헌 철폐를 위한 범도민 대회’가 청주제일교회에서 열리면서 청주의 6월 항쟁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운명의 6월 10일, 청주에서는 오후 2시에 제일교회에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를 위한 충북도민 실천대회’가 열리기로 하였다. ‘당연히’ 경찰은 제일교회와 육거리 시장을 완전히 봉쇄하였기에, 집회는 거리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장소는 육거리에서 시작되어 국민은행과 청주약국, 중앙공원 성안길에 이르렀다.

오후 4시경, 천명 이상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남궁병원 앞 사거리로 몰려들었다. 1957년 문을 연 남궁병원은 옛 읍성 자리에 있어 그 앞 공간은 상당히 넓고 도청과도 가까워 집회를 열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밤 11시까지 시위대는 경찰과 격렬한 시위를 벌여 18명이 연행되었고, 청주대생 성삼영은 복부와 왼쪽 팔에 최루탄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6월 19일에는 충북대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성안길로 진출하였는데,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1만 명 이상으로 불어나 시내를 거의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경찰은 헬기를 동원해 공중에서 위협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시위는 심야까지 이어졌다. 25일에는 시민들이 사직동 사거리에서 경찰버스를 전복하여 불태웠으며, 6월 26일, 국민평화 대행진의 무대도 남궁병원 앞을 중심으로 한 성안길 일대였다. 상인들은 담배와 음료수를 내주었고, 시민들도 많이 참가할 정도로 시위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6.29선언이 이어졌고, 7월 9일 제일교회에서 국본의 주최로 이한열 추모대회가 열렸다. 교회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추모식을 마치고 추모행렬에 나서자 시민들은 환호와 박수로 맞이하면서 승리의 공동체 청주의 6월 항쟁은 막을 내렸다.

성안길은 20년 후인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와 2016년 10월부터 시작된 반년간의 촛불 혁명의 주 무대가 되었다. 탄핵안 가결 직전인 12월 3일에는 2만 명 이상의 시민이 성안길은 물론 도청 앞 큰길을 가득 메워 박근혜 탄핵에서 제 몫을 해냈다. 참고로 박근혜의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이 충북 옥천이다.

충북 민주화 운동 세력은 1984년 최종철 열사 추모집회에서 2017년의 승리에 이르는 충북 민주화 운동의 성지 성안길을 기리기 위해 6월 항쟁 30주년인 2017년 6월 10일 기념 동판을 설치했다. ‘호헌책동 분쇄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라는 현수막 문구가 먼저 눈에 띄지만, 자세히 보면 ‘하야하라’, ‘이게 나라냐’, ‘탄핵’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어 1987년과 2016년을 모두 기념함을 알 수 있다.

다른 대도시들과는 달리 청주는 31년 전의 6월 항쟁과 촛불 혁명이 같은 공간에서 일어났기에 성안길은 독특한 역사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청주에 갈 일이 있는 독자 중 이런 시각을 가지고 성안길을 돌아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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