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대문형무소–잊혀진‘절반의역사’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태양을 등진 북향 철창”…

“붉은 옷을 걸치고 움직이는 그림자”…

“한숨에 젖어 때묻은 차디찬 벽”…

“방은 모두다 무덤의 행렬”…

“낮이나 밤이나 북향 철창은 어둡고 검은 장막 너머로 바람은 불고 불고”…

차가운 고독감이 배어있는 시어로 시작해 절망감 가득한 시어로 끝을 맺는 이 시는 고 김광섭의 쓴 <독방 62호실의 겨울>의 일부로, 20세기 이 땅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실제로 이 시는 김광섭 시인이 교사로 있던 중동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주의를 심어주었다는 죄목으로 1941년부터 약 3년 8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른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보면, 그러나 김광섭 시인 당시의 어둡기만한 그곳이 이제는 아니다. 이미 지난 1998년 역사관으로 재탄생해 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는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초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의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것은 ‘105인 사건’ 때였다. 1910년 안명근이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데, 이를 빌미로 이동휘와 양기탁, 김구, 이승훈 등 지식인과 학생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나중에 6명을 제외한 99명은 무죄로 풀려났지만, 이는 민족해방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의 서막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동양 최대 규모였는데 조선인에 대한 탄압 강도에 비례해 형무소의 규모도 날로 커져갔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려 폭탄을 던졌다 붙잡힌 64살의 강우규와 역시 사이토 암살을 시도한 송학선,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안창호, 《임꺽정》 홍명희와 《님의 침묵》 한용운, 그리고 이인영과 허위 등 의병장과 김동삼이나 오동진 등의 독립군 지도자들…. 기록이 남아있는 독립운동가만 5천여 명, 모두 4만 명이나 되는 민족해방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현재 서대문형무소는 역사공원 형태로 재현되어 일반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을 사형했던 곳도 남아 있다. 사형장은 형무소의 가장 안쪽에 있는데, 어른 키의 두세 배나 되는 담장에 둘러싸여 스산한 분위기가 더하다. 그 안에는 교수형을 하는 데 쓰였을 굵은 동아줄과 개폐식 마루판, 그리고 사형집행을 바라봤을 긴 의자가 설치돼 있는데, 볕도 잘 들지 않아 그렇게 음울해 보일 수 없다. 담장 바깥에 있는 시신 이송을 위한 동굴은 그 압권이다.

유관순이 투옥됐다 순국한 것으로 알려진 지하감옥도 다시 지어져 있다. 이 외에도 서대문형무소에는 형무소 직원들이 사무를 보던 보안과 청사와 감시탑, 6개 동의 옥사와 나병 환자용 옥사, 담장 등이 남아있다. 그러나 복원할 때 너무 많은 손을 댔기 때문일까? 지금의 서대문형무소에서는 비극적 사실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92개 동에 이르는 옥사와 담장의 벽돌은 서대문형무소 아래에 있는 독립공원을 조성하는 재료로 쓰이거나 강원도 평창의 콘도 공사장 등으로 팔려나갔다. 6개의 감시탑 중 남아있는 것이 2개에 불과할 정도로 1백여 동에 달했다던 건물은 대부분 사라졌고, 1천2백여 미터에 달했다던 담장도 4분의 1 정도만 남고 모두 헐렸다. 중국은 일본관동군의 ‘731부대’ 시설을 그대로 복원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라고 하는데, 서대문형무소도 거기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지나친 ‘박피’는 말았어야 했다.

과도한 ‘화장’도 아쉬운 부분 중 하나다. 보안과 청사로 쓰였던 전시관 지하 1층. 조선인들이 일제 경찰에게 취조․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움직이는 인형과 각종 조명․음향 기구를 사용해 실감나게 재현해둔 곳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지하 1층에서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비명 소리가 어디서나 들릴 정도였고, 그 뒤쪽에 있는 공작사 건물에서는 손톱고문이나 전기의자고문 등 여러 가지 고문을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역사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곳에서 웬 고문체험? 정색을 하고 말하면, 서대문형무소는 ‘재현’과 ‘체험’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관람자로 하여금 엄숙한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흡사 테마파크의 ‘유령의 집’에 와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주었다. 한․일간의 갈등이 지금도 여전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자칫 서대문형무소가 미래를 위한 ‘평화교육의 장’이 아니라 ‘배타적 민족주의 배양소’로 이용되고 있는 아닌지 고민해볼 일이다.

그렇다고 서대문형무소의 한계가 전시 방식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서대문형무소가 세워진 것이 1908년의 일이고 문을 닫은 것이 1987년이니 그 기간만 대략 80년에 이른다. 그런데 그 중 지금의 서대문형무소가 기록하고 있는 시기는 45년 해방 때까지, 즉 전체 역사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미군정을 거쳐 87년 폐쇄될 때까지 나머지 절반의 역사는 어디로 간 것일까?

서대문형무소는 해방 뒤 38선 이남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서울형무소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계속해서 정치범과 양심수를 수감하는 곳으로 이용됐다. 즉 일제의 경찰조직과 인원을 그대로 인수한 미 군정청은 해방 이듬해에 벌써 박헌영과 이주하 등 조선공산당 간부와 임시정부 군무부장 김원봉,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성숙 등 수많은 좌익계열 인사들을 잡아들여 서대문형무소에 가두었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끈 여운형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와 차이가 있다면 민족‘해방’운동가 대신 민족‘통일’운동가들이 들어갔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즉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수감한 자’와 ‘수감당한 자’가 뒤바뀌어야 했거늘 서대문형무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런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50년대에 이르러서는 수감자의 70% 이상이 이른바 중도나 진보운동가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이를 테면 북진통일을 주장한 이승만에 반해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조봉암 전 국회부의장이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사형을 당한 곳도 바로 이곳 서대문형무소였다. 지난 75년 군사정권에 의해 사형선고 하루 만에 ‘사법살인’을 당한 인혁당 8명도 서대문형무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 정권을 이은 전두환이나 노태우정권 때에도 같은 양상이 되풀이된 것을 보면, 결국 서대문형무소는 시대를 막론하고 일제든 미군정이든 독재정권이든 ‘지배세력의’ ‘지배세력에 의한’ ‘지배세력을 위한’ 형무소였던 것이다.

해방의 그날까지는 항일의병과 항일지사를 잡아가둬 일제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보루였고, 독재가 판치던 시절에는 정권의 안녕을 위해 기능한 서대문형무소. 그러나 지금의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vs. 한민족’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대결 구도를 전제로 모든 것이 세팅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우리 안의 다른 여러 모순은 등한시한 채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데 집중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내키든 내키지 않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남고 기억되어야 한다. 단순히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잊혀진 ‘절반의 역사’도 이야기되어야 한다. 제국주의와 독재체제의 위험성을 알리는 곳으로서, 그리고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 세력 전반에 대한 민중의 투쟁을 기억하는 공간으로서, 즉 큰 틀에서 인권을 위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금기를 깨는 것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 올바로 보듬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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