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8년 청주의 택시노조 파업을 주목하는 것은 역사상 최장기 파업이라는 점이다. 근 일년여 동안 조합원 한명 한명이 자발적으로 또 연합적으로 부당한 사용자와 공권력에 맞선 이유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뭘까?

사람은 일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부상이나 질병이 생길 수 있고, 부득이 하게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생활에 타격이 온다면 맘 편히 병을 치료하거나 집안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 그래서 회사가 어떤 경우라도 법정 시간을 기준으로 정해진 기본급을 저하시키지 못한다는 <기본급 저하 금지> 조항이 있는 것이다. 청주 택시노조의 장기간 파업 역시 근로조건을 완전 무시한 채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면서 택시기사들이 일용직 근로자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원고를 넘겨줘야 하는 날, 당시를 증언해줄 분과 인터뷰 약속이 정해졌다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순형(58세) 전도사의 전화는 뭔가에 쫏기는 듯한 나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한번에 털어내게 하는 반가움이었다.
 
운수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 
1989년 1월 19일 ‘우리들의 결의’를 통해 부당하게 해고된 운전기사들이 복직될 때까지 적극 투쟁할 것을 천명한지 17년이 흐른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대부분이 원래 회사로 복직하지 않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거나 개별 사업을 하면서 잘된 사람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각기 회사 사정과 형편이 다르다보니 회사의 회유와 오랜 기간 투쟁으로 인한 생활의 막대한 지장이 조합원들을 각자의 길로 가게 했지만 당시의 그 싸움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그때만 생각하면 끔찍하다며 다시금 그 사건을 거론하는 걸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지만요.” 원일교통 김종우(51세) 당시 조합장의 말이다. 1988년 당시 18개의 법인택시회사 1,500여명의 기사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원일교통, 영진교통, 삼보교통 운전기사 65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은 생존권 차원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잠깐 당시 상황을 따라가 보자.
- 사용자들의 간교한 회유와 술책에 근로자 대표와 사용자 대표 각 5명이 전체 조합원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불법으로 임금협상만 날치기 조인(6월 1일)
- 전체 조합원들의 의사에 따라 전면파업(6월 2일)
- 아무런 대책이 없자 각 회사별 파업노동자, 청주도시산업선교회로 갈 것을 결정(6월 7일)
- 시민들에게 정당함을 알리는 평화적 시가행진(6월 8일)
- 평화적 시가행진마저 원천봉쇄, 150여명 연행 (6월 13일)
- 일부 조합원 현장복귀(6월 17일)
- 원일, 영진, 신안, 삼보교통 4개사 조합장과 150여 조합원의 단식투쟁 결의에 이어 신승, 평화, 상당, 중원택시 조합원 농성돌입(6월 18일)
- 기사 부인 50여명 시청에서 철야농성(6월 19일)
- 중원택시 기사들 단식 동참(6월 29일)
- 19개 회사 사장과 8개 노동조합 조합장, 88년도 임금 협정안 재승인(6월 30일)


운수노동자를 지지하고 격려한 단체들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충북민주운동협의회, 청주지역민주청년연합 노동위원회, 충북민주화실천가족운동연합회, 민주정당재건 충북추진위원회, 청주민주노동자연합, 충북문화운동연합, 충청지역대학생총연합회 건설추진위원회 등 이었다.
 
이 중심에는 역시 청주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다. 7월 22, 23일 이틀에 걸쳐 정진동 목사 자택은 운수업체 사장들이 조직한 구사대에 의해 철대문과 현관 유리가 파손 되었다. 또한 돌과 썩은 생선 내장으로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되었으며 집을 폭파하겠다, 테러를 하겠다 등 협박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정 목사의 부인은 머리가 빠지는 등 정신적 노이로제를 앓았고 끝내 이 문제는 그 해 국정감사까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지역노조가 이렇게 함께 움직인 적은 없었다.”는 조순형 전도사의 말마따나 청주지역 운수노조 파업은 정부의 비호아래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온 부당노동행위를 규탄하고 인격적인 대우와 민주화된 작업장을 원하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분출된 한 여름의 대 투쟁이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각 회사별로 노조가 있었다지만 대부분 어용노조였어요. 84년인가, 영진교통의 윤경호 씨를 만나 노동자들의 고민을 함께 하면서 소규모 모임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신신택시 등 주변회사로 파급되면서 의식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조순형 전도사)
“87년 7, 8월 노동자 대 투쟁이후 노동조합이 많이 생김으로써 협상력이 강해졌다.” (김종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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