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즈음 강원탄광에도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약 1천여 명이 그 곳에서 광부로 일했고, 5백 세대가 사택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원기준 목사는 당시 광부라는 직업이 ‘거지 다음의 직업’으로 불렸다고 했다. 그만큼 갱도 안의 노동은 힘들었고, 환경도 열악했으며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직업을 떠나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암흑만은 아니었다. 분명 최하층의 삶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특유의 활력과 소통이 있었다. 동료애가 있었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만의 정이 있었다. 원기준 목사와 함께 인터뷰에 참여했던 당시 강원탄광 노동자 조호성(44) 씨도 비슷한 맥락에서 그 시절을 회상했다.



“일은 힘들었죠.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땀으로 범벅이니깐.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어요. 일 끝나면 친구들끼리 어울려 놀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이 끝나면 심심치 않게 삼겹살이나 태백 닭갈비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집에는 최첨단 가전제품도 더러 두고 살았다. 당시 지방에서는 웬만큼 살지 않으면 누리기 힘든 호사였다. 하지만 그런 호사도 사회 구조적으로 보면 없는 사람들의 ‘있는 척’ 하기에 다름 아니었다.
원기준 목사는 돈이 없던 사람들이 돈맛을 알게 될 때 그것은 또 하나의 비극이 된다고 했다. 그것은 개인적인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거지 다음의 직업이라고 불릴 만큼 힘든 노동 그리고 그 노동 뒤에 그것을 보상받으려는 휴식.
조호성 씨는 그 시절이 좋았다는 회상 뒤에 아주 비극적인 회상도 했다.
“그 때 여러 사람이 소나무에서 목을 매달고 죽었어요. 일은 힘들지, 사는 것은 마음 같이 안 되지.”
시끌벅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몇 몇 사람이 자살을 선택해야 할 만큼 고달픔과 막막함이 공존했던 곳. 그 곳이 바로 이십여 년 전의 강원탄광이었다.

구두는 장화의 마음을 모른다
1987년 강원탄광 대투쟁의 역사도 바로 이러한 광부들의 고달픈 생활상이나 심리를 제대로 간파해내지 못한 업주들의 안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당시 자신들의 괴리를 인지하고, 의식이 성장해가는 광부들을 무시한 채 제도의 개선보다는 오로지 경쟁과 감독만으로만 그들을 이끌어가려 했다.
특히 도급제(하루 동안 캐낸 석탄의 질과 양에 따라 일한 만큼 급여를 주는 제도)는 광부들 사이에 경쟁의식을 부추겨 수많은 사고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때에도 업주들은 사고를 그저 개인의 부주의로만 취급하려 했다.

원기준 목사는 이를 ‘구두는 장화의 마음을 모른다’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구두는 탄광의 업주와 간부들이며 장화는 광부들을 뜻한다. 그들의 대립은 어떤 면에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강원탄광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성완희 열사이다. 성완희 열사로 인해 강원탄광의 뜨거운 노동운동이 싹 텄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원탄광의 노동운동은 성완희 열사 이전에는 거의 전무했다고 한다. 성완희 열사로 인해 광산 노동자들의 의식이 트였고 민주노조가 설립되었으며 노동조건과 현장 분위기가 개선되었던 것이다. 또 자연발생적이며 비 이념적인 노동활동이 성완희 열사로 인해 조직화, 연대화, 정치세력화 되었던 것이다.


철암역과 태백훈련원
강원탄광은 1993년에 폐광됐다. 석탄합리화 정책에 따른 것이다. 1987년 탄광 대파업 이후 채 십년도 되지 않아 그 같은 변화가 이뤄진 것이었다. 그야말로 해일의 밀물, 썰물과 같다.

원기준 목사는 이를 노동의식은 극대화 되고, 그 반대로 탄광산업은 한계에 직면한 결과라고 했다. 1989년 십여 개월 만에 각지의 탄광에서 일어난 240여 회나 되는 크고 작은 투쟁들이 그것을 잘 대변해 준다는 것이다. 강원탄광도 그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철암역과 태백훈련원은 좁게는 강원탄광의, 또 넓게는 석탄산업의 그런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겨우 면 규모나 될법한 거리에서 철암역은 유독 크고 웅대했다.
  
 

그래서 너무도 쉽게 그 시절 철암역이 누렸을 영화가 얼마만큼 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곳은 한 때 강원탄광에서 나오는 석탄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옛일이 되었다. 강원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철암역의 영화도 끝이 난 것이다. 그 곳은 본래의 목적보다는 이제는 관광 경유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태백훈련원은 아예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한 때 그곳은 검은 노다지를 꿈꾸며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찾는 첫걸음을 떼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사유지가 되어, 건물은 모두 헐리고 야산의 한 부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입구 앞까지 가보니, 철문은 닫혀있고 늙은 개 한 마리가 경계하며 짖는다.
세월은 그렇게 역사의 현장을 조금씩 묻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성완희 열사가 남긴 역사의 정신만은 묻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성완희 열사의 분신사건 이후 전개된 광산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문화와 태백시의 민주화운동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원기준 목사도 그런 정신을 이어가고자 <광산지역 사회연구소>를 설립했고, ‘포럼 탄광촌 사람들’을 운영했다. 작년에는 북한에 연탄을 무료로 공급하는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 나눔 운동’ 등을 펼치기도 했다. 성완희 열사의 정신은 그 때뿐 아니라 지금도 시대를 열어가는 여러 횃불 중 하나인 것이다.



글 이재웅
1974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실천문학 으로 데뷔
2005년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출간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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