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 세력의 집결지 1973년 남산부활절예배사건, 뒤를 이어 1974년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난다. 민청학련사건으로 18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구속되는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한국기독교회협의회에서는 인권위원회를 발족하였고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구속자 가족뿐 아니라 대책위원회 활동가들이 이곳 기독교회관을 찾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회관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했던 정권도 종교건물에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뒤이은 1976년 인혁당사건과 3·1민주구국선언사건을 통해 더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인권위원회를 찾았고, ‘종교’라는 우산 밑으로 들어와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1978년에는 동일방직 노조원들이 생존권 보장을 위한 농성을 이 곳에서 벌이기도 했다. 명실 공히 민주운동세력의 집결지가 되어버린 기독교회관 주변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든다. 동대문경찰서·시경·치안본부·정보사·안기부 등 많은 기관의 사복형사들이 건물 밖에 상주하며 민주화운동과 함께했다. “유신 시절에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없었어요. 대학교에 경찰이 상주하는 것은 기본이고, 누군가 ‘30초만 떠들어도(외쳐도)’ 잘 떠들었다고 할 정도로 감시가 심한 시절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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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은 몸을 공중에 띄워 한국 현대사의 그늘을 끌어안고자 했던 열사 김의기(서강대 무역학과 재학). 1980년 광주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그는 삼엄한 계엄령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대중에게 광주의 투쟁을 알리기 위해 기독교회관 6층에서 자신의 몸을 날린다.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하늘에 뿌리고 자신 또한 하늘에 뿌렸다. 비록 육신은 추락했지만 그의 정신은 시대의 별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어 준다. 매년 5월 30일이면 서강대에서는 ‘의기제’가 열린다. 청년 열사의 삶을 통해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고자 하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 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 잔당들의 악랄한 언론 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의기, ‘동포에게 남기는 글’ 일부 발췌)
지난달 10일(화)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는 빈민연대소속 김도균 씨의 ‘대추리진상발표 기자회견’이 있었다. 우리는 문자와 영상을 통해 평택의 아픔을 접한다. 그리고 그것에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면서 충분히 내 할 도리는 했다는 안도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기독교회관의 역사 - 사람들이 한데 몰려 덩어리를 이뤘던 그 시대를 돌이켜 보면 현재 우리는 작고 또한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살내음을 그리워하는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 이지홍
격월간 『삶이보이는 창』의 객원기자로 활동했고, 르뽀집 『마지막 공간』에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극작을 공부하고 있으며 탈춤과 승무북을 배우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