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철은 단순하며 강하다. 힘을 가하면 다양하게 변하기도 하고 비바람에 녹슬기도 한다. 이런 철의 성질을 알기에 철을 다루는 노동자들은 그처럼 닮아가고 있었다. 권위와 힘으로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탄압했지만 현장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불만은 개인적이지만 분노는 집단적이며, 그 분노를 모으면 요구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요구조건을 내 걸면 상대방(사측)이 해결하려고 한다는 원리를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10여 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만큼 현장의 분노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중심에 있던 현대엔진에는 1980년대 초반 고적답사반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다. 권용묵(당시 권용묵 씨가 중심적으로 활동을 했기에 인터뷰를 하고 싶었지만 현재 그에 대한 평가가 분분하므로 추후 작업으로 넘기기로 하고 그가 활동했던 의미라도 충실히 전달하고자 한다.) 씨가 중심이 된 이 모임은 회를 거듭할수록 그 성격이 자신들이 일하는 작업장의 문제로 돌려지면서 문제의식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1980년 중반에는 노동관계 서적을 함께 읽으며 토론하고 ‘노동자는 누구인가’를 자각하게 되었다. 1985년 10월 24일, 이들은 의미있는 조직을 만든다. ‘2.4회’, 24일 결성했다 해서 이름 지어진 이 모임은 ‘우리 힘으로 현장문제를 개선하자’는 목표를 세우며 출발했다.

한편 현대자동차에도 1985년 초에 작은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상범 씨, 하인규 씨 등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던 5명의 노동자들이 독서모임을 만들었고 회사 근처 양정교회에 모여 지역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학습과 현장문제를 토론하였다. 이들의 관심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작업현장 문제로 모아졌다. 노동관계 서적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노동조합을 만들 것이라는 야무진 꿈을 키우면서 동료들의 잠자는 권리의식을 깨우기 위해 유인물 작업을 전개했다. 이런 불씨들이 1987년 6·29선언이라는 정치·사회적 공간이 열려지자 계급적인 직관으로 이때임을 직시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11일, 14일, 17일 그룹과 협상을 제안하면서 정상적인 노조 운영과 회사의 운영을 기하기 위해 모든 노조는 쟁의를 중지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17일 12시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을 경우 협상거부로 간주하고 현대노동자 전체가 참여하는 실력행사를 할 것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나이어린 일부 과격분자들이 노조를 빌미로 개인의 영달을 위해 노조를 이용하려 한다.”라는 사측의 왜곡선전과 오판으로 결국 8월 17, 18일 대투쟁이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17일 중공업운동장에 모인 현대노동자들은 운동장에 모여 집회를 한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면서 시내 진출을 요구하였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너도나도 남목고개로, 시내로 발길을 돌렸다. 남목은 지명처럼 남쪽의 말목장이 있었던 곳으로 예전부터 중심과 변두리를 가르는 경계라는 상징성이 있는 고개였다. 이곳을 넘으면 뭔가 해결될 것 같은, 이곳을 넘으면 우리가 스스로 뭔가를 해결했다는 것처럼…….
17일 남목고개 전 남목삼거리까지 진출한 노동자들이 더 이상 시내로 가기보다는 사측에게 시간을 주겠다는 지도부의 판단을 믿고 해산을 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숙소에서는 단전, 단수, 식당까지 폐쇄가 되어 “밥을 달라”는 밥그릇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전경의 폭력적인 강제해산이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주민들은 노동자들이 왜 싸우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게 되었고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에 든든한 지지자가 되기도 하였다.역사적인 대장정 18일의 대투쟁은 방어진 미포만에 동 터 올랐다
전날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 오늘은 결판을 낼 듯이 아예 자신이 쓰던 장비인 덤프트럭, 소방차, 지게차, 샌딩머신 등을 들고 나왔고, 그 누구도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되어 나타났다. 4킬로미터로 늘어선 노동자들의 대열이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되어…….” “야! 야! 야야야야! 꽃 바구니 옆에 끼고…….”
김호규
1988년에 울산에 내려가 현대정공에 취업하여 현재까지 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며 현대정공 수석부위원장을 지냈고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금속산업연맹 사무처장을 맡았다. 현재 현대자동차노동조합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황석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