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

전북도경 대공분실은 이 시집을 단서로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고정간첩이나 대단한 지하 공산당 조직이라도 적발한 듯 과장된 수사보고를 냈고 1982년 11월 이광웅, 박정석을 비롯한 많은 교사들을 수업 중에 또는 인근 식당에서 연행하여 대공분실에 장기간 불법 구금한 채 협박과 고문으로 관련자들이 마치 공산주의자로서 평소에도 서슴없이 용공 언동을 일삼고 드디어 1982년 4월 19일에는 오송회라는 반국가 단체를 구성했다는 억지 자백을 얻어냈다.
몽둥이로 전신을 마구 때리고 물고문, 통닭구이고문, 비행기고문, 심지어 발가락 사이에 전선을 연결하는 전기고문까지 서슴지 않았으며 잠을 재우지 않고 밥을 굶기면서 관련자들이 사회주의자이고 오송회라는 단체도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용공단체로 구성하였다는 등의 자백을 얻어낸 뒤, 이 내용들을 계속적으로 암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고문과 자백, 암기의 과정은 관련자들이 1982년 11월 2일 경찰에 연행되어 불법구속되어 있던 25일까지의 24일 동안과, 11월 25일 구속영장에 의하여 정식구속이 집행되고 검찰에 송치된 1982년 12월 13일까지의 19일 동안을 합한 43일에 걸쳐서 반복되었다.
결국 43일 동안 행해진 고문과 자백, 암기의 과정을 거치면서 관련자들은 어떤 것이 자기의 생각이고 어떤 것이 수사관들의 생각인지, 어떤 일이 자기가 한 행동이고 어떤 것이 수사관이 일러준 것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정신적인 혼미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79년 1월에 나는 KBS로 직장을 옮겨 박정희의 죽음과 서울의 봄,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세월을 하염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5년 전의 대화내용이 문제가 되었어요. 날벼락 같은 연행에 이어 밑도 끝도 없는 언어의 편린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 사실이 되어 내 앞에 들이닥쳤습니다. 나보다 앞서 잡혀온 이광웅, 박정석 선생한테서 캐낸 것이었어요. 세상에 5년 전 대화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강제로 정확하게 기억해내야만 했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고 갖은 수모와 폭행을 당하면서 수백 장의 자술서에다 5년 전에 내가 말하고 남이 말한 내용을 억지로 기억해서 일목요연한 시나리오로 구성해야만 했어요. 그래야만 실감이 난다고 해서요.”
1982년 오송회 사건이 만들어지기 약 5년 전인 1978년에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약 1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던 조성용(67, 전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표) 씨가 연행된 까닭은 고문 과정에서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름을 대라는 수사관의 계속된 추궁을 견디다 못 한 박정석 씨가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조성용 씨와 문규현 신부의 이름을 댔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교 후배였던 이광웅, 박정석 선생을 만나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문학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사실이 갑자기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 사실이 되어 경찰의 고문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나더러 좌경 의식화된 진원을 밝히라는 데 이거야말로 죽을 지경이었어요. 경찰은 나에게서 압수한 계간지 『창작과 비평』 14권을 들이대고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별수 없이 그것들을 뒤적이다가 라티모어와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 관계 논문 여기저기에 수없이 줄을 그어대었더니 통과되었어요. 그것은 나중에 법정에서 증거물로 제시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내가 소련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국외 공산계열 찬양 고무였습니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착오를 했는지 아니면 ‘스키’와 ‘코프’ 때문이었는지 이 대목이 계속 따라다녔죠. 법정에서 모두진술(冒頭陳述) 때 이 점을 호소했더니 그제서야 공소장에서 삭제되었습니다.”
1983년 1월 11일경 당시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였던 이광웅, 박정석, 전성원, 이옥렬, 황윤태, 강상기, 채규구, 엄택수와 KBS 남원방송국 방송과장으로 근무하던 조성용 등 9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5년 전의 대화내용이 문제되어 구속된 조성용 씨


재판이 시작된 지 5개월이 지나 10회의 공판을 거친 뒤 검찰은 피고인들에게 3년에서 12년의 징역형과 자격정지를 구형하였다. 그 중 3명에게만 실형이 그리고 조성용 씨를 포함한 6명에게는 선고유예 판결이 내려졌다.
1심 판결에 대해 검찰과 피고인들은 모두 항소했다. 검찰은 양형이 지나치게 낮은 점을 피고인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다시금 주장하게 되었다.
“2심 판결은 찌는 듯한 7월의 더위 속에 내려졌습니다. 긴장된 순간이었죠. 그러나 결과는 우리 9명 모두에게 1년에서 7년까지의 실형이었습니다. 법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죠. 판사들은 도망치듯 법정을 빠져나갔고 가족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재판을 지켜보던 문정현, 문규현 두 신부님은 성직자의 품위도 망각한 채 의자 위에 올라서서 울부짖었습니다.”
1988년 6월 군산제일고등학교에 복직된 채규구(51, 군산 진포중학교 교사) 씨는 현직 교사들을 1개월 가까이 불법 감금했기 때문에 경찰이 자신들을 무혐의 처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독재정권은 민주세력을 철저히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실정법상 좌경용공 분자로 몰아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교직사회가 상대적으로 순응적이고 보수성이 강하다는 점을 악용하여 교직사회를 철저히 장악, 저항세력의 성장을 제지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오송회라는 사건을 날조했다고 짐작됩니다. 사실이냐 아니냐는 상관없이 필요하면 만들어냈습니다.”

“오송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오자 끊임없는 고난이 뒤따랐지만 한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찬과 격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사건 당시 나는 참교육이 무엇인지, 교사다운 교사는 어떤 모습인지, 우리 앞에 어떤 민족적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지조차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 했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옥중에서야 비로소 한민족 지상과제인 통일, 조국 민주화, 참다운 인간해방 등에 관하여 확연하게 깨달았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다짐했습니다. 내가 교단에 돌아가기를 고집했던 두 번째 이유는 군산제일고 졸업생들에 대한 사죄를 위해서였습니다. 악랄한 검찰은 사제지간의 윤리까지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스승을 고발하기 위한 증인으로 제자들을 법정에 세웠고, 심지어 당시 재학 중인 어린 학생까지 동원하였습니다. 스승을 고발하기 위한 증인으로 불려나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한 제자의 모습을 보며 통한과 분노를 삼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출감 뒤에 본격적으로 운동권으로 살아왔다는 조성용 씨는 할 수 있는 일이 민주화운동밖에 없었다고 한다.
 

<글 / 서 성 란>

1967년 익산 출생.
1996년 중편소설 `할머니의 평화`로 실천문학 신인상 수상.
장편소설 `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과 소설집으로 `방에 관한 기억`등이 있다.

<사진 / 노 순 택>
다큐멘터리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