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한 모퉁이에 둥지를 틀다

평일 낮인데도 인사동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서울 관광의 필수 코스답게 많은 외국인들과 한국의 젊은 남녀들이 가게마다 기웃거리며 한국의 전통문화를 눈요기하고 있었다. 대형 관광상품 가게와 스타벅스와 같은 외국기업이 들어서서 예스러운 정취나 소박하고 정감 어린 멋을 더 이상 찾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젊은 세대와 외국인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비하면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인사동만한 곳이 없긴 하다.
또한 인사동은 화랑이 많기로도 유명하고, 오랫동안 예술인들이 만남의 장소로도 애용해 왔다. 그러한 장소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절을 꼽는다면 단연 1980년대다. 군부독재정권이라는 공동의 적을 향해 예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공통의 문제 의식을 가지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던 곳으로서 그 전방위적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 바로 ‘그림마당 민’(이하 민)이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사동의 이정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수도약국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건물이 있다. 차가 다니는 길 쪽으로 나 있는 단성갤러리와 같은 건물로 골목으로 꺾어들면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보인다. 계단 초입의 철문 위에는 VIP라는 룸살롱 간판이 내걸려 있다. 취재를 갔던 때는 영업시간이 아니었던지라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곳이 그러니까 ‘민’이 있던 공간이다. 당시 ‘민’의 큐레이터를 맡았던 곽대원(49세·미술평론가) 씨는 그 자리를 안내해주며 민중미술의 거점이었던 공간이 소비향락문화의 절정인 룸살롱으로 바뀐 것에 대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며 안타까우면서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민중미술의 물적 토대로서 탄생하다

1986년 3월에 문을 연 ‘민’은 9년 동안의 역사적 책무를 다하고 1994년 말에 문을 닫았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한국 미술이 최초로 사회운동의 주체로 나선 1980년대 ‘민’의 탄생은 시대적 요구였고,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시절, 민중미술과 민미협(민족미술협의회)과 ‘민’은 하나의 유기체였다.
일제 식민지의 암울한 시기는 물론 4·19혁명과 5·16쿠데타와 유신정권을 거치는 동안에도 미술은 사회 모순과 민중의 삶을 외면하고 오로지 서양에서 수입된 화법을 답습하며 유미주의에만 충실했다. 그러다가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드러난 폭압적 정치 상황에 직면하면서 민중미술이 태동하게 되었다. 표현의 자유가 박탈되고 억압과 부조리가 만연한 권위주의의 시대에 미술가들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 결성된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현실과 발언, 두렁, 임술년, 서울미술공동체 등의 미술동인은 억압적인 정치 현실과 고답적이고 관념적인 기성 화단을 비판하는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펴나갔다.
1985년 7월, 민중미술가들은 아랍미술관에서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라는 대규모 청년작가연립전을 연다. 20대의 혈기왕성한 작가 35명이 작품을 출품했고, 출품작들은 하나같이 강력한 현실 비판을 주제로 삼았다. 전시장은 연일 관람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지속적인 민중의 저항으로 수세에 몰리던 정권은 이와 같은 미술계의 움직임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물리력을 동원해 탄압하기에 이른다. 전시 8일 째가 되던 날, 19명의 작가가 연행되고 작품이 탈취되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거점이었던 `그림마당 민`은 현재 `VIP룸살롱` 이라는 소비향략문화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충격에 휩싸인 미술가들은 예술가로서의 생존권과 창작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이 절실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노동자신문에 4칸짜리 만화 <깡순이>를 그린 이은홍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신촌벽화와 정릉벽화가 파괴되고 벽화를 그린 작가가 연행되는 등 민중미술계를 향한 정권의 탄압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사건으로 촉발된 미술계의 단일 조직에 대한 필요성이 갈수록 절실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85년 11월 22일, 120여 명의 미술가들이 모여 결성한 것이 민족미술협의회다. 그리고 그 물적 토대로 문을 연 것이 ‘그림마당 민’이다.

민주화 세력들을 결집시킨 ‘불순한 다방’


“화랑은 대개 기업이나 개인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그림마당 민’은 작가와 평론가들이 작품으로 모여 만든, 세계 최초이자 미술사상 유일한 전시장입니다. 전시회를 통해 마련한 기금으로 장소를 임대한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는데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예술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소통의 장으로 이용되었으니까요.”
‘민’의 역사적 의의를 이와 같이 밝힌 곽대원 씨는 ‘민’이 문을 열 때부터 1992년 말까지 큐레이터로 일했다. 그야말로 ‘민’의 산증인인 셈이다. 말이 큐레이터지 전시 기획부터 온갖 잡일, 궂은 일을 도맡아한 일꾼이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유인물을 만들었고, 툭하면 비가 새서 물을 퍼내야 했으며, 수많은 방문객들을 접대해야 했고, 수시로 찾아오는 담당 수사관들도 상대해야 했다.
‘민’은 민중미술의 전시장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회의장이었으며, 전 예술 장르를 아우르고도 남을 법한 예술가들이 내남없이 들락거리는 ‘다방’이었으며, 여당 정치인들을 비롯해 민주인사들이라면 당연히 들러서 그림 한 점씩 사주어야 하는 곳이었다. 곽대원 씨는 당시 민주화 운동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거의 안 온 사람이 없을 정도라며, 그들을 아울러 ‘그림마당 민 세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공개된 전시장이면서 ‘불순한’ 인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모여드는 ‘민’은 언론에겐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고,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해외교포와 외국인들에겐 필수 답사 코스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민’을 감시하는 눈이 많을 수밖에 없었으니, 종로경찰서 정보과와 대공과, 문체부 미술담당관, 치안본부, 안기부, 보안사 등 6개 기관 수사관들의 달갑지 않은 방문도 잦았다.


곽대원씨와 인터뷰를 했던 초당이란 이 찻집도 당시 예술인들의 자주 드나들던 곳 중 하나였다.

주요 기획전으로 <통일전>, <반고문전>, <풍자전>, <탄압 사례전>, <여성과 현실전>, <정치선전전> 등이 열렸으며, 한국미술사 강좌, 민족미술학교 등의 대중 강연과 강좌, 그리고 민족미술대토론회나 노동운동 연대지원 등을 통한 대중과의 결합 속에서 많은 성과물을 쌓아갔다. 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인 공해추방운동연합이나 농민단체 등 사회운동단체와의 연계 전시회도 지속적으로 열었는데, 그럼으로써 열악한 사회단체의 재정난을 해소시켜주는 ‘금고’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그 중에서 <반고문전>은 가장 큰 탄압 사례로 꼽힌다. 1987년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연 <반고문전>은 종로경찰서 3개 중대가 출동해 몸싸움을 벌이며 대치하였고, 약 일주일 동안의 전시 기간 내내 계단 입구부터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는 바람에 전시장은 완전 봉쇄되었다. 관람객이 전혀 출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전시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전시회가 끝난 뒤 작품들을 슬라이드로 제작해 전국에 배포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인권 회복과 고문 근절을 호소하자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이 외침은 각계 각층의 힘과 연결되어 6월항쟁의 함성으로 이어졌다.
이 일로 곽대원 씨 역시 고초를 겪었다. 전시회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문화예술단체 책임자로 문서를 제작·배포하다가 장안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던 것이다. 그는 ‘드디어 국가보안법으로 걸려들어가는구나’ 생각하며 일주일 동안의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요행히도 구속 직전에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민`의 큐레이터 였던 곽대원씨, 전시 기획과 잡일, 유인물 제작, 하다못해 담당 수사관까지 담당해야 했던 그는 그야말로 `그림마당 민`의 산 증인인 셈이다.

“그때 우리 고문변호사도 잡혀가서 고문을 당할 지경이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재미있었어요. 때리면 때릴수록 힘을 얻었고, 오히려 그런 효과를 노리면서 ‘나 잡아가라’ 하는 식이었죠.”
그의 말대로 끊임없이 정치적 메시지를 생산해내고 예술사적 사건을 터트리는 ‘민’을 통해 민중미술의 파급력은 날로 커져갔다. 그 형태는 판화, 만화, 벽화, 걸개그림 등으로 다양했다. 특히, 1987년과 그 이후 거리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국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대형 걸개그림들은 한국 민중미술이 낳은 독보적인 양식으로 인정받았으며, 그 대표작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이다.
곽대원 씨는 여러 기획전 중에서 재미있었던 것으로 <풍자전>을 들었다. 다름 아닌 노태우 풍자전으로 당시에 노태우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곧바로 자신을 풍자해도 좋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 풍자하라기에 이왕 할 것 확실히 해서 보란 듯이 전시장에 내다걸었다. 그 역시 사상 초유의 일로 여전히 군부독재가 이어지고 있던 시대에 국가 원수를 비웃고 조롱하는 그림이라니……, 그러나 노태우는 어쨌든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제스처라도 취해야 했기에 전시회는 아무 탈 없이 성황리에 열렸다. 늘 암울했던 시대적 분위기에 찌들어 있던 국민들에게 풍자는, 더군다나 현직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는 숨통을 틀어쥐는 찜통더위를 가르며 불어오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심지어 개그맨들까지 찾아와 아이디어를 얻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여전히 죽지 않고 떠도는 망령, 국가보안법


당시 `그림마당 민`의 전시장 내부 <사진제공 곽대원>
 
그 시절에 왕성한 활동을 했던 민중미술가는 신학철, 손장섭, 이종구, 홍성담, 임옥상, 박불똥, 류연복, 최병수 등이다. 그 중에서도 신학철은 1989년에 <모내기>라는 작품으로 구속되었는데,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것은 10년 넘게 미술표현의 자유와 검열 문제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민중미술 탄압 사례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10년 동안 무죄와 유죄를 오가다 1999년에 유죄 확정과 징역 10월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강산이 열 번은 족히 변했을 세월이 흐른 2007년, 특히 6월항쟁 2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던 시점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예술가가 있었으니, 그는 사진작가 이시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