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목성동주교좌성당(이하 목성동 성당)은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안동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서 한 시대를 누렸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붉은 벽돌과 높은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양식에 가까운 건축물이었다. 안동 시가지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목성산 이마 위에 올라앉아 풍수지리로 볼 때도 손색이 없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안동 어디에서 보더라도 높은 산 위에 올라앉은 성당 건물은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외부 사람들이 안동을 둘러보고 이미지를 새긴다면 몇 손가락 안에 들기에 모자람이 없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안동 사람들에게도 목성동 성당이 각별하기는 마찬가지다. 성당 들머리를 지나면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기 마련인 매력이 있었다. 우선 눈에 띄는 구 교구청 건물의 양식도 특이하지만 창문을 빼놓고는 온통 담쟁이덩굴이 뒤덮고 있는 모습은 무척 이색적이었다. 그 옆에 성당으로 오르는 길은 오래된 수목들을 거느리고 있어 운치가 더했다. 그 길을 올라가면 무슨 아늑한 동산이라도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길섶에는 성모 마리아 상이 안동 시내를 굽어보는 작은 동산이 있었다. 가파른 길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면 그 끝에 검붉은 외양을 지닌 성당이 지긋이 앉아 있었다. 오래된 수목들과 오래된 서양 건축의 맛이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신자들에게는 참으로 신성한 공간이었지만, 이런 매력은 여느 시민들의 발길을 무던히도 불러 모았다. 하다못해 가난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그저 그만이었다. 여느 공원 못지않은 훌륭한 휴식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이 지니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더하여 소중한 추억까지 깃들여 있으니 안동 시민들의 자긍심에 적으나마 이바지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지리적 아름다움과 건축물의 독특한 멋
목성동 성당의 자연지리적인 아름다움과 건축물이 지니는 독특한 멋은 두고두고 이야기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설명했다고 한다면 목성동 성당을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큰 정신과 아름다운 영혼의 울림이 있는 성소라는 점은 상식이니 접어두고라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70년대와 군부독재의 군홧발로 짓이겨지던 80년대에 저항의 외침과 투쟁이 살아 숨쉬던 또 하나의 성지였다는 점이다.

‘오원춘 사건’으로 전국의 이목 집중
‘오원춘 사건’은 당시 천주교의 시국발언이 날로 강도를 더해가는 데다가 급기야 1978년 12월 27일에는 한국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까지 창립되자, 탄압 차원에서 당국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농민운동은 1978년 ‘함평고구마투쟁’에서 피해 농민들이 공권력을 상대로 보상을 받아낸 것에 한층 고무되어 있었다.

오원춘은 안동교구 농민회 소속으로 영양 청기분회지역 감자피해보상 싸움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정보기관이 그를 납치하여 폭행, 협박한 것에 대해 오원춘이 양심선언을 하면서 범 천주교 차원에서 대응을 한 것이다. 오원춘은 물론이고 관련자들이 구속되었고 법정에서 납치를 둘러싼 진위 여부 공방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0·26으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자 구속자들이 전원 석방되면서 사건도 끝이 났다. 천주교 차원에서 조직적·장기적으로 투쟁을 한 것이 유신독재를 종식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그 현장이 바로 목성동 성당이었던 것이다.

천주교 안동교구는 1981년 어느 곳보다 먼저 농민운동의 거점이 된 ‘안동 농민회관’을 건립했다. 축성 미사에는 근 5백 여 명이 참석하여 추수감사제, 농민대회, 한마당 큰잔치를 열었다.

문화회관, 농민회관과 함께 트로이카 시대
낱낱이 다 열거하지 않더라도 목성동 성당이 안동지역의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거점이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안동지역 어느 곳에서 시위를 벌이더라도 늘 재집결하여 수습하고 마무리하던 공간이었다. 장기농성으로 이어질 때는 아예 이곳에서 싸움이 시작됐으며, 또 이곳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전경들과 대치하며 격렬한 싸움을 펼치던 참호이기도 했다. 성당 앞 좁은 도로를 전경들이 점거하고 그 주변을 시민들이 에워싸고 발을 동동 구르던 풍경이 그 시절에는 일상이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민주화운동의 자취가 남아 있던 목성동 성당은 그 수명을 다했다. 그 유서 깊은 건축물은 허물어지고 새 성전이 들어섰다. 그곳에서 2004년 4월 25일에 있었던 봉헌식 당시 주임 신부였고 안동지역 민주화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조창래 신부와 현재 주임신부인 김영필 신부를 만났다.

“비록 상징적인 공간은 외양을 달리 했지만, 그 역사와 그때 같이 했던 사람들은 그대로 있어요. 목성동 성당은 역사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렇게 쓰인 것이지요. 그 당시에는 다른 장소를 빌릴 수도 없었고 우리 천주교 또한 그런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공권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곳, 경찰이 맘대로 들어 올 수 없는 곳이 여기다 보니 자연 그렇게 함께했던 거죠. 교회의 이상과 사회적 움직임이 잘 맞았던 거죠.”

언덕 위의 빨간 집, 그 목성동 성당 대신 새로운 성전이 들어섰다. 비교적 평안해 보이는 공간의 이미지에 또 어떤 역사가 기록될 지 궁금하다. 그렇더라도 이 공간이 종교적으로만 쓰여도 무방한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글 안 상 학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신춘문예에 시 「1987年가 11月의 新川」이 당선.
시집 『그대 무사한가 』(1991), 『안동소주』(1999), 『오래된 엽서』(2003)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권종대』(2004)편 발표.


사진 황석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