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소수의 선도 투쟁이었다면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은 이론을 토대로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죠. 하지만 미국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수준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농성자들도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 단지 광주학살의 배후를 묻고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것에 문제 제기하러 들어온 거다.’ 국민적 정서를 고려한 거죠. 그런데 86년이 되면서 반미를 전면적으로 내걸고 투쟁하게 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지요.”
  
 
서울대 83학번이자 공대 학생회장으로 신림 사거리 집회를 함께 준비했던 장유식 변호사(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 회장)의 설명이다. 분단된 조국과 독재정권 하에서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학생들 사이에서 반미자주화운동은 급물살을 타고 확산됐다.
4월 4일에는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가 결성되고 ‘반전반핵투위’도 이에 소속되어 이재호 위원장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청계천 4가 미 공병대 앞에서 성조기 소각 투쟁, 영등포 로터리에서 반미투쟁, 미국의 리비아 폭격 규탄투쟁, 남영동 미 8군 USO 타격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한편 투쟁위원회와는 별도로 총학생회 차원에서도 운동이 진행됐는데 학생들은 각 단과대학과 총학생회 선거 공간을 이용해 핵전쟁 위기와 민족공멸의 상황을 알려 나갔다. 자연대 학생회장으로 선출된 김세진은 반미 시위와 홍보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평소 성실한 모습과 토론에서의 치열한 태도로 주변 학생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전방입소 거부 투쟁 결의
그 무렵, 성균관대에서는 85학번 2학년 500여 명이 전방입소 훈련 거부를 선언하고 100여 명이 철야농성에 돌입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는 학생들을 군 조직의 일부로 취급하던 시기였어요. 1학년 때는 문무대라고 불렀던 학생병영훈련소에서 일주일 정도 내무반 교육과 사격 훈련을 받았고, 2학년 때는 전방입소훈련이라고 해서 실제 전방 부대에 들어가 병영문화를 강제로 체험하게 했죠. 총학생회가 있기 전에는 학도호국단으로 학생들을 관리했고, 2학년 때까지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을 정도였어요.”
장유식 변호사의 말처럼 전방입소제도는 대학을 군 구조의 일부로 편입시킴으로 해서 대학사회의 비판의식을 말살시키려는 억압 장치였던 것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와 자민투는 성균관대의 투쟁을 높이 평가하면서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예정된 서울대 85학번들의 전방입소 거부 투쟁을 결의하였다. 4월 16일에는 총학생회장 김지용을 위원장으로, 이재호를 공동부위원장으로 하는 ‘전방입소훈련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4월 28일 입소거부투쟁을 집중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별위원회는 학교 안을 돌면서 홍보를 하고, 『민족의 활화산』이라는 소책자도 만들어 교내와 타 대학교에 배포했다. 입소 당사자인 85학번들은 학내 곳곳에서 전방입소훈련과 미국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과별, 단과대별로 입소 거부를 결의했다.
 
 달아오르는 학생들의 의지에 따라 특별위원회는 전방입소 거부선언을 한 뒤, 4월 28일부터 중앙도서관에서 농성하면서 ‘민족대학’을 선포하고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그 낌새를 눈치 챈 학교 당국은 26일 오전부터 28일까지 도서관을 휴관시켜 버렸다. 1차 농성 계획이 무산되자 급히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의대 도서관을 농성 장소로 선정하고, 김세진이 사전 답사를 책임졌다.

거사 예정일은 27일 오후 1시, 농성 현장을 지휘할 지도부로 김세진, 이재호 등이 이때 결정됐다. 이 계획은 26일 밤 4,5명씩 조 단위로 연락체계를 갖추고 있던 85학번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경찰에 의해 캠퍼스 주변이 통제되고 진입을 시도하던 학생 100여 명이 연행되는 것으로 두 번째 농성 계획도 불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