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 건대항쟁의 현장을 찾아

-농성학생 대표 정현곤 씨 동행취재




태풍 ‘매미’가 지나가고 때늦은 더위가 찾아왔다. 부신 햇살을 받아 번득이는 건국대의 일감호 표면은 잘 닦은 유리 같았고 호수 주변을 산책하는 학생들의 얼굴은 모처럼 햇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하듯 싱싱하다. 등나무 그늘 아래 나무의자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학생들 틈에 끼어 1986년 당시 공안당국에서 공산혁명분자라 규정지었던 정현곤(40)씨를 만났다. 스물 셋의 공산혁명분자는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이제 건국대를 찾아도 담담하다 말하며 살풋 웃는 그에게서 지난 세월의 상처는 쉽게 엿볼 수 없다. 정 씨는 서울대 지구과학과 83학번이다. 건대항쟁 당시에는 서울대 자민투 위원장이었으며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이하 애학투련)의 조국통일분과 의장을 맡고 있었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농성의 시작

건대항쟁 당시 건물을 점거했던 학생들의 대표는 애학투련 의장이었던 고려대 자민투 위원장 김신 씨가 아닌 정현곤 씨였다. 그가 농성학생 대표를 맡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첫날 저녁까지만 하더라도 도서관과 본관, 사회과학관 등 서로 다른 건물에 들어간 학생들끼리 왕래가 가능했어요. 본관에서 지도부 회의를 가졌는데, 한 건물에 지도부가 모두 모여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서 각자 흩어졌고 의장이었던 김신 씨는 밖으로 내보낸 거지요.”

정 씨는 본관에 남게 되었고 건국대를 빠져나간 애학투련 의장을 대신해 농성학생 대표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동서남북 네 지역으로 나눠 각 지역별 애학투련 발족식을 이미 무사히 마친 상태였다. 건대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전국 애학투련 발족식이 있던 날은 10월 28일. 가을이 저물어가고 겨울의 들머리에 한 발 내딛은 때. 애초 농성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가벼운 점퍼 차림으로 모이지는 않았을 터이다. 게다가 농성을 시작한 뒤에는 첫눈까지 내려 이루 말할 수 없는 추위에 학생들은 시달려야 했다.
 

10.28건대항쟁 기림상


하지만 이미 조짐은 당일 아침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전날 밤을 건국대 주변의 모처에서 지낸 정 씨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10월 28일 새벽 6시쯤 건국대에 들어와 학생회관에 자리를 잡았다.

“농성과 같은 형태의 집회를 예상했더라면 건국대에서 발족식을 치르지는 않았을 거예요.”

애학투련 지도부가 발족식 장소를 건국대로 정한 이유는 이미 집회가 예상되는 다른 학교를 경찰이 원천봉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건국대는 집회를 치르기에 썩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경찰이 학내에 진입할 경우 막아내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국대는 크기가 만만치 않을뿐더러 경찰이 원천봉쇄를 하더라도 학생들이 진입할 수 있는 틈이 많은 곳이었다. 건국대는 그들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애학투련 발족식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아침 9시부터 건국대 학생들과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경찰은 8시부터 건국대를 원천봉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경찰은 검문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특별한 제지 없이 건국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두 시간 뒤에는 본관 앞 황소상 주변에 모여 발족식을 치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발족식의 마지막 차례가 다가왔다.

“순식간이었어요. 정문을 통해 들어온 경찰들이 황소상 주변 잔디밭을 겹겹이 둘러싸고, 최루탄이 이천 여 명의 학생들 가운데로 날아들었지요.”

이른바 전투조라 불리는 학생들이 경찰의 기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투조의 일부는 발족식에 참가한 학생들과 분리되어 학생회관으로 밀려났고 나머지는 정문 옆의 사회과학관으로 밀려났다. 전투조가 아닌 대부분의 학생들은 본관으로 밀려갔고 경찰들은 해산작전을 펼치지도 않은 채 봉쇄만 하고 있었다.

“사실 그때부터 이상하기는 했어요. 관례대로 하자면 경찰이 검거작전, 해산작전을 펴기 마련인데 그냥 건물들로 몰아넣기만 했거든요.”

군사독재 정권의 정권연장 음모

우리는 호수 앞을 떠나 당시 발족식이 열렸던 본관 앞 잔디밭으로 자리를 옮겼다. 십칠 년 전 이천 여명의 학생들이 추위에 떨면서 애학투련 발족식을 치르던 그곳에는 학생들이 서넛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정 씨는 감회가 새로운 듯 황소상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의 눈에도 술자리를 벌인 어린 후배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에 그는 대학이란 우리 사회의 새로운 문화가 싹트는 곳이며, 언제까지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곳이라는 말로 답한다. 우문에 현답이었다. 건국대의 상징물인 황소상을 중심으로 두고 보면 당시 농성학생들이 들어갔던 본관은 서쪽, 도서관은 남쪽, 사회과학관은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조금 떨어져 있지만 학생회관은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농성집결지였던 본관 내부


첫날부터 경찰은 학생들이 들어간 건물의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막았다. 미처 농성을 예상하지 못한 학생들은 배고픔과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창문들은 건물로 날아든 최루탄 때문에 깨지거나 최루가스를 몰아내기 위해 깨버렸기 때문에 속절없이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학생들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 위해 모닥모닥 붙어 앉았고 남학생들이 벗은 속옷을 잘게 찢어 피운 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간신히 비쳐볼 뿐이었다. 그들은 경찰에게 귀가를 보장한다면 농성을 풀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경찰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때 학생들은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사실 탈출 작전을 구상하기도 했어요. 여학생과 일 학년 학생들만이라도 내보내 달라는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탈출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추위와 배고픔에 학생들은 지쳐갔고 그런 상태로는 설령 탈출하더라도 대부분이 붙잡히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탈출을 시도하지 않은 건 아직도 경찰과 협상의 여지가 남아있다고 믿었던 탓이다.

1986년은 아시안 게임이 있던 해이다. 전두환 정권은 아시안 게임으로 정국을 주도했다고 믿고 있었으며 ML당 사건 등 공안사건을 터트리며 국민의 대통령 선거 직선제 요구를 잠재우려 했다. 하지만 그해 2월 4일 서울대 집회를 시작으로 일어난 직선제 개헌투쟁은 쉽사리 잠들지 않았다. 국민의 직선제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적 연대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애학투련 결성에 관한 논의는 급물살을 탔으며 결국 10월 28일 발족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애학투련은 희생양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애학투련이 직선제 쟁취와 함께 중요하게 내걸었던 반미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는 미국의 내정간섭을 막지 못한다면 군사독재 정권이 연장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어요. 반미를 내걸었던 건 적절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무리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정현곤 씨는 자신들의 실수에 대해 선선히 인정했다. 그들이 반미를 제기하는 것을 앞질러 무리하게 반공이데올로기 분쇄로 나아간 이유는 당시 그들을 지배했던 분위기 탓도 있었다. 김세진, 이재호, 이동수 열사 등을 겪은 서울대 출신들이 죽은 자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정면 돌파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죽음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폭력을 낳기 마련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그들 역시 겪었던 것이다. 당시 건물에 들어가 농성을 하던 학생들은 바깥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공산혁명분자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을.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이천 여명의 학생들이 건국대 다섯 개의 건물에 갇혀 있는 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북측의 금강산 댐 건설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학생들에게 선전방송을 했던 방송실은 아직 그대로다.


불혹에 다다른 그들

정 씨가 본관으로 기억하고 있는 흰색 4층 건물은 지금 행정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 행정관으로 갔다. 정 씨의 설명에 따르면 구조는 예전과 똑같다고 한다. 다만 사무실로 쓰이는 방문들이 지금처럼 철문이 아닌 나무문이었다고 한다. 국제협력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방은 당시 기자회견을 했던 곳이며 연구처장실은 정 씨가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거처하던 방이다. 하지만 그는 주로 4층 방송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당시 그는 밤을 새워 선무 방송을 하느라 내내 목이 쉬어 있었다. 방송실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에 언뜻 회한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행정관은 특이한 구조다. 가운데가 뻥 뚫려 있고 계단이 나선형으로 되어 있으며 각 층의 방들은 미음 자 구조를 이루고 있다. 당시 행정관을 점거한 학생들은 2층에서 3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주로 4층에 몰려 있었다. 막상 4층에 이르니 옥상으로 통하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정 씨는 용케도 기억을 더듬어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찾아냈다. 십칠 년이라는 세월도 그의 기억을 모두 앗아갈 수는 없었나 보다. 그는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잠시 멈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저 아래 은행나무가 있는 길에서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그 모습이 떠오르는 걸 보니 바로 여기가 그곳이 확실하군요.”

그는 행정관에 들어서면서도 실감하지 못했나 보다. 그날의 기억 가운데 생생한 풍경을 끄집어놓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십칠 년 전의 현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 듯했다. 

기분 탓일까. 옥상은 폐허를 연상시켰다. 시멘트 가루가 덩어리로 떨어져 굴러다니고 도색은 군데군데 벗겨져 있으며 철제 난간은 녹이 슬었다. 하지만 흔적은 없다. 남쪽에 자리 잡은 도서관 옥상은 그곳보다 한 층 높았다. 정 씨가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에 있던 학생들이 줄에 돌을 묶어 이쪽 옥상으로 던졌어요. 그리고 그 줄에 라면이나 초코파이 같은 먹을 걸 묶어서 건네줬지요.”

본관에 있던 학생들은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사회과학관 쪽에서 먹을 걸 던져주기에는 너무 멀었고 그나마 가까운 도서관 쪽 학생들이 기지를 발휘했다.



농성 나흘째 아침부터 경찰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매리스를 건물 아래 까는 모습을 보며 학생들은 진압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가장 적은 수의 학생이 있던 학생회관부터 차례로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전투조 학생이 가장 많이 들어가 있던 사회과학관의 저항이 가장 극렬했으며 그곳이 가장 나중에 진압되었다. 차례로 각 건물들이 진압되고 다른 학생들이 끌려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본관에 있던 학생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자수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정당성만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바리케이드에 불을 지르는 등 나름대로 저항을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회과학관에서는 건물 앞으로 나와 경찰과 대치하던 학생들이 불붙은 바리케이드로 밀려 화상을 입는 경우도 발생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팠던 건 불에 덴 상처만은 아니었다. 헬기로 뿌려대는 최루액에 부풀어오른 살갗만은 아니었다. 진압경찰이 내려치는 곤봉만도 아니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최소한 지도부만이라도 목숨을 걸어서 그때 학생들을 지켰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후회를 했어요.”

건국대 건물에서 친미독재타도를 외치며 농성 중인 학생들 _ 경향신문사(1986.10)


정 씨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학생들을 지켜주지 못한 게 한이 되었다고 한다.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인 1285명의 구속. 하지만 열사들 또한 그들이 죽는 걸 바라지는 않았을 터이다. 결국 건대항쟁의 정신은 이듬해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맞물려 거세게 일어난 전 국민적 저항과 궤를 같이 하면서 전대협이라는 역사적 조직을 만들어내는 힘이 되었으니.

정 씨는 본관 농성 나흘째 아침에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곳 옥상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구속되어 1심에서 12년 형을 구형받고 6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재판결과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죄책감 때문에 항소마저 포기했던 그는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88년 12월의 대사면으로 풀려 나온 그는 민청련, 참세상을 여는 노동자 연대 등을 거쳐 지금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사무처장으로 있다. 무엇에도 흔들리거나 유혹되지 않는 불혹. 하지만 행정관을 빠져나와 총총히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는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건대항쟁에 참여했던 몇 몇이 개인적으로 민주화운동 심사를 제기해 공로를 인정받기는 했지만 아직 건대항쟁 자체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런 뒷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면 건대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불혹 너머 지천명, 이순, 종심에 닿는다 해도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리라. 사회과학관 앞에 서 있는 ‘10․28 건대항쟁 기림상’이 유난히 반짝이는 건 오랜 비 끝에 찾아든 햇살 탓이었을까.

글 손홍규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최명희 청년 문학상 소설 수상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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