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심장에 서 있는 뫼비우스 띠 : 여정남 공원을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요즘 대구-경북 소위 TK가 주목을 받고 있다. 박근혜가 무너지고 보수를 대표하겠다는 대선주자들이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이곳을 자주 방문하여 ‘구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구는 원래부터 ‘보수의 심장’ 또는 ‘수구꼴통의 아성’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대구의 별명은 ‘동방의 모스크바’일 정도였고, 1946년 10월에 미 군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중봉기가 보여주듯이 대구 경북 지역의 좌익-혁신세력은 꽤 강력했고 전쟁으로 인한 ‘청소’가 진행된 뒤에도 도시의 분위기는 타 지역에 비해서 진보적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눈에 가시 중의 하나였던 ‘대구매일신문’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사건이라 할 대구매일신문 테러 사건이 역사에 남아 있을 정도로 대구는 반골 기질이 두드러진 고장이었다. 4.19혁명의 전주곡이었던 2.28의거가 대구에서 일어난 이유도 이런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이 지역 출신 박정희의 쿠데타와 장기집권 이후 뒤집히고 말았다.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이 대거 권력층으로 올라서면서 소위 30년 넘게 지속되는 TK패권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경북대학을 중심으로 한 민주-혁신세력은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글의 주인공 여정남은 경북대의 총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은 이미 작년 4월에 칠곡 현대공원 묘지 이야기를 하면서 다루었기에 이번 글은 여정남 공원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https://www.kdemo.or.kr/blog/location/post/1221

여정남 열사는 8명의 희생자 중 비교적 ‘지명도’가 높은 데, 185cm가 넘는 거구여서 눈에 띄이기도 했지만 만 31세로 최연소였던 데다가 유일한 미혼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북대학교 후배이기도 한 시인 이하석은 2010년 4월, 10일, 이 공원 제막식 때 역설적인 제목의 추모시를 남겼다.



그대 이름만으로도 밝은, 봄

이 하 석

봄 연다고 꽃 가지 흔들다 죽은
여덟 혁명가의 막내야, 막내야.
장가도 못 간 채 서른 한 살의 나이로
겨울바람에 꺾였네.
피 낭자한 민주제단.

그 피, 이 땅 적셔 비로소
온 몸 생기 돌아 나무들 새 잎새 돋네
죽음 불러서 봄이 왔네.
그러나, 이 언덕에 새로 불러 세워야 할 사람,
애타게 불러봐도 나타나지 않네.

살아있는 우리들만 꽃가지 흔드네.
대답 없지만, 그가 흘린 피 온 몸 생기 돌아
이 땅 나무들 새 잎 푸른 그늘 짙네.
그 그늘에 우리들 모여 서로 부르며 새삼 찾는 이름들 속에서

우뚝, 돌아보는 이.
그래, 떠난 이들 속에서 우뚝
손 흔들며 늘 돌아볼 그대.
이 언덕의 환한 봄 그대가 지폈으니,
우리들 한데 모여 더 크게 지피네.
그대 이름만으로도 밝은, 봄
민생민주자주통일의 꽃이 여기서 피네

42주기를 앞둔 3월의 어느 날,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 옆에 위치한 여정남 공원을 방문했다. 의외로 큰 규모에 살짝 놀랐다. 우선 거대한 손이 "뫼비우스" 띠를 떠받치는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에 대한 소개 글을 찾을 수가 없어 다소 아쉬웠다. 7년 전 건립식 당시에는 뫼비우스의 띠가 노란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던 사진을 보았는데 지금은 은색이다. 아마도 퇴색해서 그런 듯한데 원형을 보지 못해 조금 안타까웠다. 상상력을 약간 발휘하면 안쪽과 바깥쪽이 모두 하나가 된 뫼비우스의 띠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를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손은 열사의 염원이던 민주주의 와 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조각가 이태호의 작품으로 좌우 3.5미터에 달한다. 이 조형물 외에도 추모비와 열사의 부조, 건립위원 명단이 새겨진 비, 그리고 당시의 사진들을 새긴 동판이 달린 비가 공원에 자리잡고 있다.

요즘 박근혜 탄핵을 즈음하여 ‘김재규 장군’ 묘에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이곳에도 꽃다발 같은 것이 놓여 있지 않을 까 ‘기대’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의 흡연장소로 사용되는지 많은 담배꽁초가 바닥에 굴러다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눈에 띄는 꽁초들을 주워서 치운 다음 열사께 묵념을 드리고 소주 한 병을 바쳤다.

믿거나 말거나인 말이지만 말년의 박정희는 만취하면 인혁당 사건 처리를 후회하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결국 박정희는 10.26으로 최후를 마쳤고, 그 때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딸 박근혜는 대통령 선거 당시 인혁당 사건의 부당성을 애써 부인하는 말을 하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당선되었지만 얼마 전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당하는 대통령이 되는 최악의 불명예를 당하고 말았다. 여정남 열사를 비롯한 희생자들은 지하에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올해 4월 9일은 공교롭게도 집권이 유력시 되는 정당의 대선 후보자가 결정되는 다음 날이다. 부디 그 때문에 인혁당 사건이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더 기억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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