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가 떠난 곳 : 포천 약사봉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의 정치가, 종교인, 언론인, 저술가, 민주화운동가였던 장준하 선생에게 8월은 아주 특별한 달이다. 1918년 8월 27일에 태어났고, 1945년 8월 18일, 미군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내려 조국땅에 돌아왔다. 그리고 운명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하였기 때문이다. 1975년은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의 사법 살인을 당한 해이기도 하다.


[한겨레신문 1998.08.11] 정부수립 50돌 10대 의혹사건 진실은 어디에 7. 장준하 의문사

의문사 당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장준하 선생은 호림산악회 회원 약 40여명과 함께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하여 산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오후 약사봉에서 약사계곡 방향으로 뻗은 절벽 아래에서 유일한 목격자라는 김용환과 호림산악회 회원들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은 계곡에 있는 평평한 바위로 옮겨졌고 그 다음부터 그 바위는 검안바위라고 불리우게 된다. 형식적인 사고 조사와 시신 수습이 이뤄진 다음, 시신은 유족들에게 인계되었다. 당시 정부는 실족사로 발표했지만 아직까지 고인의 사망에 관한 의혹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추락 지점이 사진에서 보듯이 경사 75도의 가파른 암벽이어서 특수장비 없이는 내려갈 수 없는 곳이며, 굴러 떨어지는 물체가 멈출래야 멈출 수 없는 지형이다. 시신에는 외상이나 골절이 전혀 없었고, 휴대한 보온병과 안경이 깨지지 않았다. 또한 유일한 목격자라는 김용환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고 계속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많은 의혹이 있고 조사결과를 다 합치면 수 천쪽에 달할 정도이기에 이 정도로 줄일 수밖에 없다.

유족에 의해 운구된 시신은 8월 18일 오전에 상봉동 자택 안방에 마련된 빈소에 안치되었다. 비보를 접한 함석헌, 양호민, 김준엽, 계훈제 등이 전날부터 자리를 지켰고, 이후 김대중, 양일동, 고흥문, 김홍일, 정일형 등 야당 정치인들과,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김동길 교수 등 수백여 명이 빈소를 다녀갔다.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외유 중이어서 조화를 보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삶이 완전히 변한 인물은 늦봄 문익환이었다.

8월 21일 오전 8시에 자택에서 가족 발인예배가 엄수되었다. 이어 유해는 영구차로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오전 10시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는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 신구교 합동으로 열린 이 장례식에는 백낙준, 유진오, 김영삼, 김대중, 박순천, 함석헌, 양일동, 김홍일, 김준엽, 김동길, 천관우 등 각계 지인들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 1,500여 명이 참석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문익환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강력하게 유신정권을 비판했다. 영결식 후 유해는 시청 앞, 국회의사당, 중앙청을 거쳐 인혁당 열사들의 희생된 서대문형무소 앞을 지나면서 ‘원혼끼리의 만남’을 가진 다음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의 나사렛 묘지에 옮겨져 안장되었다. 장준하의 측근 백기완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문 선생님이 장 영감님의 대타로 나서주지 않겠습니까?”

문익환은 그대로 행동했다. 그는 다음해 3월 1일 같은 장소, 즉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성명서를 쓰고 구속된다. 이후 1994년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18년의 삶 중 절반 이상을 감옥에서 보내는 투사의 삶을 살아낸다.

2012년 여름 폭우로 인해 장준하 묘소 뒤편의 석축이 붕괴되었다. 이렇게 되자 파주시가 조성한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의 장준하공원으로 유골을 이장하게 되었는데, 이장시 유골을 검시한 결과, 머리 뒤쪽에서 지름 5~6 cm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된 구멍과 금이 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에 대해 아들 장호권은 “검시를 맡은 서울대 법의학 교수가 ‘상처가 특이하다. 만약 추락했다면 바위 가운데 직경 5㎝의 동그랗게 튀어나온 바위 위로 오른쪽 귀 뒷머리가 정확하게 떨어지지 않는 한 그런 상처가 나기 어렵다’고 했다. 망치와 같은 크기로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어, 사인은 망치에 의한 가격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렇게 되자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이를 근거로 사건에 대한 전면적 재조사와 진상규명 착수를 요구하였다.

이어 2012년 10월에는 박형규 목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이 참가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상임고문을 맡은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가 발족되었다. 12월에는 국민대책위원회와 민주통합당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공동으로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체 재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2013년 12월, 유기홍 의원 주도로 장준하 특별법이 발의되었다. 당시 정의화 국회의장과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등 보수정당 의원 일부도 발의자로 참여했다. 법안은 ‘장준하 사건’만 아니라, 다른 의문사 사건들도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 의문사 유가족과 시민단체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이지만 아직도 보수정당의 반대로 법안 통과되지 않고 있다.

 

 

사고현장까지 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지 않고 공식적인 기념시설도 없다. 특별법 제정과 별도로 하루 빨리 정비가 이루어 졌으면 한다. 장준하 선생은 앞서 소개했듯이 민주화 운동가 이전에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종교인, 언론인, 저술가였다. 최근에는 선생을 ‘친일을 하지 않은 우익’으로서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백낙준, 장기려, 김성한, 양호민, 김수환, 지학순, 조지훈, 김수영 등과 함께 대한민국을 ‘설계’ 했다고 보는 책도 나왔다. 앞으로 선생의 의문사진상규명 못지않게 이런 쪽의 연구도 많이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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