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찾아서: 진주>  

거룩한 분노 - 세 개의 힘


글, 사진 이종헌

 

`국경의 밤`을 쓴 파인 김동환은 1929년 6월, 「삼천리」창간호에 진주를 이렇게 묘사했다.

"인가만 빼 놓으면 전 시내가 고적 속에 파묻혔고 또 떠들썩한 기녀의 노래와 가야금만 덮으면 거리거리가 무덤 속같이 고요해지는, 고전적이며 비유동적인 도회이다. 그래도 이 속에 조선의 목숨을 한 백년이나 늘려 놓았다 하는 정열적인 여성인 논개 누나의 영혼이 길이 잠들어 있거니 생각하면 영원히 생명이 약동하는 살아 있는 도성으로 보여 무한히 친근하고 사랑스러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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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논개를 아는 것은 진주를 아는 것이요, 진주를 아는 것은 근세 조선사를 아는 것이니 이 땅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많은 박력을 가지고 찾아들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같은 고도(古都)이면서 서울에서 살다가, 평양에 와서 꿈꾸다가, 진주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생각하게 된다할까. 이토록 이 땅은 시와 사기(史紀)의 소재로 가득 찬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겠다."

진주는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진주에서 난다."는 말이 있듯 진주는 옛부터 많은 중앙 관료를 배출한 지역이다.

이런 관료들이 낙향해 향반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노래를 읇고,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겼다. 따라서 진주는 음식문화, 기생문화가 꽃을 피워 북평양 남진주라 불리며 명기의 고장, 풍류의 고장이 되었다.


오랜 세월 경상우도의 중심이었던 진주성, 남강이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일까?

진주에는 기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진주의 절반이라 불러도 좋을 논개가 있다.

전란의 현장을 다니며 직접 목격한 백성들의 참혹상을 기록한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르면, 논개는 진주의 관기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과 백성이 모조리 죽자, 곱게 단장하고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베푸는 자리에 나아가 왜장 가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文助]를 유인한 뒤, 그를 껴안고 남강 물에 투신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논개는 18세 되던 1591년 봄에 최경회와 부부 인연을 맺었고,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자 관기로 변장하고 왜장을 유인해 왜장과 함께 의암에서 순국했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논개는 1593년 음력 6월 29일, 나이 20세에 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조선인 10만을 학살한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산화(散花)해 갔다.


촉석루 옆 의기사에 모셔진 논개 영정, 손가락 마디마디에 낀 옥가락지가 눈물겹다.


잎새 떨군 나무 한 그루가 논개의 넋이 새겨진 의암바위를 굳세게 지키고 섰다.

분노와 슬픔, 불안과 공포로 맞이한 이 날의 그녀를 위해 작가 김별아는 이렇게 썼다.

"고통마저 기꺼이 껴안고 운명의 심연 속으로 투신한 그녀는 지금 어디 있는가? 푸르른 남강의 물결을 가만히 바라보며 여전히 펄럭이는 그녀의 영혼을 생각한다. 아프고, 아리땁다."


촉석루


거사를 감행하기 전, 논개는 석양이 지는 촉석루 마루에 앉아 스무살 생애를 뒤돌아 보며 남강의 물결을 한참이나 바라보지 않았을까?
어찌, 감회가 없었겠는가...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산홍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의 손자 이지용은 1905년 내부대신 때 을사조약에 찬성, 조인에 서명해 을사5적이 된다.

이런 이지용이 진주기생 산홍에게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주고 산홍을 첩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자 산홍이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거절해 격분한 이지용에게 두들겨 맞는다.

그 후, 1906년 11월 22일 자 대한매일신보 2면에는 이런 기사가 실린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 앞에 당당함은 일개 기생이 아니라 절대 권력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기개 어린 항일투사로 보는 게 마땅하다."

이 일 후에도 계속 이지용의 집착에 시달리던 산홍은 "논개는 왜장을 안고 몸을 날려 꽃다운 이름을 남겼건만, 자신은 세상에 태어나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구나!" 한탄하며 시 한 수를 남기고 자결로 생을 마감 한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있네."


진주성 의기사 처마에 걸려 있는 기생 산홍의 시 `의기사감음`, 「산홍」이라는 글씨체가 선연하다.

그리고, 1919년에는

진주 남강 변에서 “왜놈들 물러가라!”고 외쳤던 진주기생들이 있었다.

1919년 3월 19일 한금화(韓錦花)를 비롯한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진주기생 6명을 붙잡아 구금하였는데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고 전해온다.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진주성 안에 세워진 호국사.
그 담장 너머로 매화가 무심한 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1919년 기미년 삼월에도 매화는 피고, 또 졌을 것이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개 높은 기생은 또 있었다.

평생을 우상과 허위와 싸워온 지식인 리영희 선생의 통역 장교(중위) 시절 이야기다.

지리산 공비토벌이 한창이던 어느 날, 연대장이 장교들의 사기를 돋우고 위로하기 위해 기생들이 나오는 진주의 한 술집에서 술판을 마련하였다.

이 중위는 옆 자리에 앉은 기생에게 술자리가 파한 후 따로 만날 것을 제의했고 당연히 허락한 걸로 알고 계속 술을 마시던 중 그 기생이 말없이 사라진 것을 알고 그녀를 찾아 나선다.

남강가 절벽 보잘것 없는 곳에 그녀의 초가가 있었다.

이 중위는 "약속을 해놓고 왜 아무말 없이 사라진 거야!" 고함을 질렀지만 그 기생은 미동도 하지 않고 마루에 서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화가 난 이 중위는 허리에 찬 권총을 빼들고 `내려 오라`며 한 방을 쏘았다.

그런데 버선발로 내려와 살려 달라며 무릅을 꿇을 줄 알았던 기생은 자세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그대로 조용히 버티고 서서 이 중위를 내려다 보며 훈계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총으로 겁을 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젊은 장교님은 나중에 큰 분이 되겠지만 사람을 그렇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기생은 강요당해 아무데나 따라가지 않습니다."

대학을 갓 나온 22세의 청년 장교는 그 훈계에 기가 죽어버렸다.

리영희 선생은 2005년 문학평론가 임헌영과의 대화 형식으로 펴낸 자서전 `대화`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얼마나 왜소한 인간인가. 보잘것없는 술집 여자라고 업신여긴 그 상대방의 그 당당한 기백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위대한가. 나는 그 기생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압도당했다. 그 기생의 인간적인 큼 앞에서 내가 얼마나 왜소한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인간의 크기, 도덕적인 크기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참으로 나에게는 귀중하고, 어쩌면 고귀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깨달음의 기회였다."

진주 기생들의 기개와 충절이 더 애뜻하고 아리따운 것은 그들이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결코 인간의 위엄를 잃지 않고 몸소 의(義)를 실천했기 때문이 아닐까.


남강가 벼랑 위로 겨우내 강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댓닢은 서걱거릴 뿐 단 한번도 푸르름을 잃어 본 적이 없다.

요즘, 품격 없는 여인들로 인해 나라가 어지럽다.

이 사태를 목도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룩한 분노까지는 아닐지라도, 고함이라도 한번 질러보고 싶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