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몬터널 너머의 조선학교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일본은 혼슈와 홋카이도, 큐슈, 시코쿠 등 큰 섬 4개와 그 외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혼슈와 시코쿠, 혼슈와 큐슈 등은 해저터널이나 다리 등으로 연결돼 사실상 하나의 이어진 땅과 다름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연결 된 게 혼슈와 큐슈다. 지난 1936년 착공해 42년에 개통된 혼슈의 시모노세키(下關)와 큐슈의 기타큐슈(北九州)를 잇는 전체 길이 약 3.6km의 ‘간몬(關門)터널’로 가능해진 일이다.

그런데 이 터널에는 당시 대부분의 토목공사 현장이 그러하듯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돼 노역을 해야만 했던 조선인들의 넋이 서려 있다. 간몬터널의 시모노세키 쪽 출입구에 서있는 순직비가 그 증거 가운데 하나다. 철조망 때문에 가까이 가서 살펴보는 것은 쉽지 않지만 지난 1942년 간몬터널을 파다가 발생한 폭발사고로 사망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순직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순직비에는 4명의 조선인 이름도 새겨져 있는데, 현장 안내를 맡은 재일조선인 2세인 배동록 선생은 모두 상급 기술자들의 이름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사망한 조선인의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정확한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는 상당수의 조선인 하급 노동자들은 순직비에조차 이름이 오르지 못한 채 죽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면 그저 다 끝난 역사 속의 일로만 치부할 뿐 지난 20세기 강제동원의 역사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는 데 관심을 갖는 이들은 여간해서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그 당사자들이 여전히 살아있다거나 후손들이 오롯이 그 역사를 감내해오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생각은 간몬터널 북쪽에 위치한 혼슈 서남단의 도시 시모노세키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그 옛날 조선통신사가 에도로 가는 길에 묶었던 숙소로 쓰인 아카마신궁이 있는 시모노세키…. 하지만 시모노세키에 한일 우호의 현장만 있는 건 아니었다. 배동록 선생과 함께 시 외곽에 자리 잡은 ‘오오츠보(大坪)’라는 동네를 찾았다. 배 선생은 지난 1940년 시모노세키 맞은편에 있는 기타큐슈의 야하타제철소에 강제동원돼 고된 노동을 해야만 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4남매 중 한 명이다.

“이 동네는 오오츠보보다는 다른 이름으로 더 잘 불려졌어요. 바로 똥굴 마을이죠. 생활 환경이 그만큼 열악했다는 뜻이예요.”

배 선생에 따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오츠보 근처에는 형무소는 물론 분뇨처리장과 화장장까지 있어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일본인들은 살기를 꺼려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돼 끌려온 조선인들, 해방 뒤에는 졸지에 무국적 신세가 된 하층의 재일조선인들이었다.

“일본에서 조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철을 주워다 팔거나 돼지나 닭을 잡는 일처럼 험한 일 밖에 없었어요. 고국으로 돌아갈 돈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던지라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죠. 그런데 일본 사람들에 비해 당연히 돈이 없었고, 그러니 이런저런 멸시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냄새 나는 공터에 움막이나 함석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겁니다. 이 동네의 역사가, 우리 재일조선인의 역사가 그랬어요.”

새 건물들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지금도 시모노세키에서 하꼬방(はこ房), 이른바 궤짝 따위로 만든 판자집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마을이 오오츠보다. 경제대국 일본의 여느 일본인 마을들과는 달리 어두운 구석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마을이다.

문제는 그 역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간몬터널 남쪽의 기타큐슈에 위치한 큐슈조선중고급학교로 향했다. 큐슈조선중고급학교는 학교가 자리한 기타큐슈시를 비롯해 일본의 내해인 세토나이카이 건너편의 시모노세키에 사는 학생들까지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주요한 조선학교 가운데 한 곳이다.

그런데 몇 년 전 찾았을 때와 비교해 학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예전과는 달리 교문도 굳게 닫혀 있었고 운동장도 적막해 보였다. 학생들의 모습도 이전과는 달랐다. 교복 삼아 입던 저고리를 입고 있는 여학생이 눈에 띠지 않았다. 요 몇 년 새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일본 우익들의 위협적인 언행과 실질적인 공격이 늘어나자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이 회의를 거쳐 치마저고리를 입지 않기로 한 것이다. 치마저고리를 입으면 조선학교 재학생이라는 게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학생들의 안전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총무부장 겸 상임이사인 윤경룡 선생의 말을 들어보니 교복만 바뀐 게 아니었다. 그 동안 일본 정부가 외국인학교를 포함한 일본의 모든 고등학교에 평등하게 지원해오던 ‘취학지원금’을 북일 관계 등을 이유로 조선학교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배제해버린 것이었다. 고등학생 1인당 약 12만엔, 한화로 약 130만 원 정도였는데 그 돈이 끊기면서 조선학교 운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적잖은 조선학교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리고 있었다.

조선학교를 옥죄는 것이 비단 일본 정부와 지자체, 우익만도 아니었다. 조선학교를 지원하려는 한국 시민단체들에 대해 정작 한국 정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지난 1957년 이래 오랜 기간 북한 정부가 조선학교를 지원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학교는 북한이 세운 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과 그 후손들이 해방 직후 세운 학교다. “돈이 있는 자는 돈을, 힘이 있는 자는 힘을, 지혜 있는 자는 지혜를”이라는 모토로 자손들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즉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부러 색안경을 쓰고 보려고 하는 이에게 원래의 색깔은 안타깝게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1946년 9월 당시 525개교에 달했던 조선학교는 2016년 말 현재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를 포함해 원래의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상태다. 그나마의 조선학교들마저도 일본 조야의 탄압과 한국 정부의 편협함 탓에 그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