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 주교가 잠든 땅 : 제천 배론 성지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1993년 3월 12일, 유신 정권의 가장 강력한 적수 중 하나이자, 이 출범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만든 지학순 주교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 단명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주교가 은퇴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정년이 75세인, 임기가 3년이나 남은 상황이어서 많은 이들이 안타깝고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지학순 주교는 1921년 9월,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청학리(현 황해북도 중화군 중화읍)에서 태어나, 50년 1월 월남한 소위 ‘38따라지’ 출신이다.

조선왕조 500년 내내 극심한 차별을 받았던 서북인들은 근대화 이후 유교질서가 무너지면서 다른 지방보다 빨리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며 수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장준하, 정일형, 계훈제, 함석헌, 박영숙, 백기완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지학순 주교 역시 그 맥을 잇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덧붙이면 13년 전 64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승훈 신부와 광주항쟁 기간을 비롯해 27년간 광주시민과 함께 한 윤공희 대주교 역시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이다. 월남한 서북출신이라고 ‘서북청년단’ 활동만 한 건 아니라는 좋은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지학순 주교가 영면한 곳은 제천의 배론 성지이다. 왜 원주가 아닌 제천에 묻혔는지 의아해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 가톨릭의 교구는 도의 이름이 아닌 도시의 이름을 사용하고, 광역행정구역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원주교구 역시 그러한데, 강원도의 남부와 제천, 단양을 관할하고 있다. 

제천, 원주간의 국도변에 위치한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 중 하나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당시로서는 가장 ‘반체제 분자’들인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이었다.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상황과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 그리고 ‘외국의 개입’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은 1만자가 넘는 장문의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써서 유명해졌다. 또한 1855년(철종6년)에서 1866년(고종3년)까지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배론 신학교가 소재했던 지역이다. 참고로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의 산골짝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이기 때문에 유래했는데 한자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徘論)이라고도 한다. 

배론은 물론 가톨릭의 성지다. 하지만 이곳이 주는 메시지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국가 주도의 사상 외에 다른 사상에 대한 탄압, 그리고 탄압을 받는 이들이 외부에 대해 손을 내밀 때 권력자들이 취하는 알레르기적 반응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이 선교사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인권상황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국내 인사들이 외국 언론에 접촉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유신의 마지막을 앞당긴 사건 중 하나가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사건이고 그 이유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정부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힘을 써야 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 남한강 편>에서 배론 성지와 지학순 주교의 무덤도 등장하는데, 저자 유홍준 교수가 같이 갔던 신경림 선생에게 선생이 황사영을 읊은 시 중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에 대해 물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다. 

 

누가 그더러 반역자라고 하는가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언인가고 

(중략)

다시 남한강 상류 궁벽진 강촌에 와서

그 아내를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내 친구를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여기서 유 교수는 “내 친구를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란 시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신 선생께 묻자, 노시인의 대답은 이러했다. 

“유신시절에 학생들을 마구 잡아가고, 박형규 목사와 지학순 주교까지 끌어넣고, 문인 간첩단을 조작해서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을 옥에 가두고, 동아와 조선일보 기자들까지 잡아가고, 그런 공포의 시절에 배론에 오니 나도 누가 빨리 와서 박정희를 쫓아내, 민주인사들을 다 석방시킬 수는 없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황사영처럼 생각하게 될 까 무서워진다고 했던 거지.”

여기서 ‘외세’를 끌어들이고자 한 ‘반체제 인사’들에게 그토록 가혹했던 이 땅의 권력자들에게 하나만 묻고자 한다. “님들은 얼마나 자주적으로 행동하셨나요? 그래서 이 나라를 자주국가로 만드셨나요?” 라고 말이다. 

여기서 이 글의 주인공 지학순 주교가 1974년 투옥되었을 때, ‘외세’인 교황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교황님! 이곳은 호젓한 감방입니다. 그러나 저는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조작된 죄목으로 갇혀 있고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이 곳이지만 저는 하느님과 일치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신앙과 사명감에서 조용히 이 고통을 감수하며 기도드립니다. 저는 더욱 침묵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성교회의 기도에 합하여 전 인류를 위하여, 정의와 평화구현을 위하여, 특히 우리 조국을 위하여 조용히 무릎 꿇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인품과 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선종 후 그 분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단법인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을 설립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활동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들을 격려하고자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제정하고 매년 시상식을 갖고 있다. 1997년, 제1회 정의평화상이 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주어졌고, 대상자는 2회 때부터는 외국으로 확대되었다. 파키스탄 정의평화위원회, 우즈베키스탄 인권연합, 국제가사노동자연맹 등이 역대 수상자로 선정됐다. ​​

스무 번째를 맞는 2017년에는 일본의 "헬기기지반대협의회"가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헬기기지반대협의회는 일본 오키나와의 주민 모임으로, 20년 넘게 미군기지 건설 저지 활동을 해왔다. 

협의회는 매일 일본 오키나와 나고시 헤노코 지역 헤노코항구 앞 천막촌에서 농성하고, 미군기지인 캠프 슈와브 앞 점거, 해상 저지활동 등을 통해 오키나와 평화운동과 자연보전활동을 펼치고 있다. ​

 

[인물을 말하다] 지학순 주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