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뚜얼슬랭 학살 박물관’을 가다


글. 사진 권기봉/warmwalk@gmail.com

캄보디아에 가본 한국인에게 어디를 다녀왔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캄보디아 북서부의 도시 씨엠립에 있는 앙코르와트라고 답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찾는지 앙코르와트 근처에는 한국 자본이 운영하는 호텔이나 식당, 카페, 마사지샵 뿐만 아니라 한국 여행자들의 민족애나 호기심을 타킷으로 한 북한 식당까지 마치 인도네시아판 단둥 같은 느낌마저 풍긴다.

그런데 씨엠립을 찾는 여행자들이 고대사의 현장 앙코르와트만 방문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 여행자든 단체 여행자든 거의 대부분이 방문하는 곳이 와트 마이(Wat Thmei)이다. 지난 1975년부터 79년까지 캄보디아를 지배한 폴 포트의 급진공산주의정권 ‘크메르 루주(Khmer Rouge)’가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시민을 학살했던, 이른바 ‘킬링 필드(Killing Field)’ 당시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사원이다. 200만 명이면 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거의 4분의 1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인데, 성인 뿐만 아니라 코흘리개 어린이들도 상당수 희생되었기에 방문객들을 숙연하게 한다.



씨엠립에 당시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사원이 있다면 수도 프놈펜에는 주요 학살지였던 킬링 필드 그 자체, 그리고 그 역사를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는 뚜얼슬랭 학살 박물관(Tuol Sleng Genocide Museum)이 있다. 특히 뚜얼슬랭 학살 박물관은 고문과 살인을 저질렀던 현장에 들어선 것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동네 토박이라는 50대의 매표소 직원은 안내 팸플릿을 건네주며 박물관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도 곁들어 주었다.

“애당초 이 자리에 있던 것은 고등학교(Tuol Svay Prey High School)였어요. 담벼락 바로 옆에는 초등학교도 있었지요. 그런데 폴 포트가 집권하면서 두 학교 건물을 S-21이라는 보안대 시설로 바꾸면서 정치범들을 데려다 고문하는 곳으로 썼습니다. 여기 끌려온 이들은 말이 정치범이지 대부분은 지식인이거나 예술인 아니면 돈이 좀 있는 일반 시민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나 농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뙤약볕 아래에서 일을 하는 직업이 아니라며 끌려온 이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그들은 … 거의 대부분 죽어서야 나갈 수 있었지요. 폴 포트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을 받았던 한 명을 포함해 단 7명만 살아남았어요.”

뚜얼슬랭 학살 박물관은 우리네 학교처럼 일반 주택과 상점들이 뒤섞여있는 블록 안에 위치해 있었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으로 학교의 수위실이 있을 법한 곳에 매표소가 있었고, 왼쪽으로 학교 교사를 이용한 고문 및 수감 시설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었다. 출입구 왼쪽으로 가까운 곳에서부터 A동, ‘ㄴ’자 모양으로 B동과 C동이 차례대로, 거기서 다시 직각으로 꺾여 A동과 마주보는 식으로 D동이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운동장을 중심에 두고 ‘ㄷ’자형 배치를 하고 있었다.


 

그 중 A동과 B동 사이에는 높이가 10미터는 됨직한 그네 틀과 물동이가 있었다.[사진 P1080070] 이전에는 학생들이 운동을 하던 기구였지만 크메르 루주가 집권하면서부터는 사람을 매단 뒤 그 아래 물동이에 내리 꽂는 식으로 물고문을 하던 것으로 용도가 바뀌었다고 안내원은 말했다. 건물들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옛 고문기구들과 함께 당시 어떤 식의 고문이 행해졌는지, 그리고 폴 포트(Pol Pot)가 이끌던 크메르 루주의 오류가 무엇이었는지, 극단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큰 지를 고발하고 있는 현장성 짙은 흔적들이다.

그러나 한계도 엿보였다. 박물관의 전시 내용이나 구성이 오로지 크메르 루주의 잔혹함을 강조하는 데에만 중점을 두었을 뿐이다. 그들이 붕괴시킨 친미 론놀정권의 부패상과 미국의 역할, 크메르 루주에 대한 중국의 묵인과 지원, 크메르 루주를 몰아낸다며 들어온 뒤 오랜 기간 눌러 앉아버린 베트남 등 외부 세력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이 없어 방문자들로 하여금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데에도 어딘가 미흡해 보였다.

더욱이 일본의 지원으로 B동 건물을 통째로 할애해 진행하고 있는 오키나와 평화기원자료관과의 공동전시회를 돌아보다 보면 이 박물관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나아가 학살과 전쟁 그리고 인권이란 가치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다. 설명문의 내용이 대략 이런 식이다.

“A lot of People’s lives were robbed in this war. Okinawan people learned the stupidity of war and the value of peace.”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때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비로소 그 전쟁을 계기로 오키나와 사람들이 전쟁이란 문제해결 방식의 어리석음과 평화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과연 이것이 오키나와 전투의 특징을 잘 드러낸 문장일까? ‘학살’ 혹은 ‘대량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그 책임 소재가 불분명할 뿐이었다. 즉 진실은 그 문장이나 다른 전시물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키나와인들은 오히려 일본군의 총발받이격으로 죽임을 당했고, 특히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미군 상륙 직전 일본군으로부터 죽음을 강요받았던 사실을 놓고 보면 그런 왜곡도 왜곡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뚜얼슬랭 학살 박물관의 전시 설명문은 자국어인 크메르어보다 영어를 더 대접하고 있었고, 오키나와 평화기원자료관의 공동전시회에서도 설명문도 일본어나 영어가 먼저였고 크메르어는 나중이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관람 대상으로서 캄보디아인들보다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는 외부인을 대상으로 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도 그럴 것이 2006년 유엔의 지원 아래 크메르 루주 전범을 단죄하기 위한 특별재판이 본격화된 이래 지난 2012년 S-21의 감독 책임자였던 카잉 구엑 에아브가 종신형을 받고 수감되기는 했지만 정작 킬링 필드의 핵심 책임자들은 아직까지 별다른 처벌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4년 핵심 전범 2명을 종신형에 처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제 1심 판결이 난 것일 뿐 국제전범재판의 최종심인 2심이 언제 진행될 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는 상태다.

그러는 사이 최고 지도부 가운데 한 명인 이엥 사리(Ieng Sary)는 2013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이자 사회부 장관이었던 이엥 티리트(Ieng Thirith)는 치매를 이유로 가석방된 상태다. 폴 포트는 이미 지난 1998년에 숨졌기에 결국 당초 특별재판이 시작된 이후 기소된 이는 고작 9명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아직 살아있는 피고인은 폴 포트의 오른팔 누온 체아(Noun Chea)와 국가주석을 지낸 키우 삼판 단(Khieu Samphan) 2명 뿐이다. 게다가 30년째 집권하고 있는 훈센(Hun Sen) 총리마저도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일한 전력이 있기에 특별재판에 상당히 비협조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메르 루주와 킬링 필드를 보는 국제적인 시각과 내부 사정이 간단하지 않은 캄보디아 사이의 괴리, 그리고 최빈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제 사회 문화적 현실들…. 과연 뚜얼슬랭 학살 박물관은 자신들의 미래를 앞으로 어떻게 그려갈까. 현실적 한계로 말미암아 단순히 옛 사실을 나열하고 알려주는 박물관의 좁은 역할에 매몰되어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이곳을 기반으로 사회 기풍을 진작하는 역사의 교육장이자 인권 증대의 보루로 거듭날 수 있을까. 비록 전시 내용이나 구성이 충실하다고 확신을 갖고 말하기 힘든 뚜얼슬랭 학살 박물관이지만, 도리어 그곳을 돌아봄으로써 역사적 과오를 청산하고 단죄하는 데 얼마나 지난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