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현장에서 화합의 상징으로 거듭난 ‘스타리 모스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를 찾아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3년 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자가 유학 중이라는 이유로 화제가 된 곳이 있다. 발칸반도에 자리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라는 나라의 모스타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적잖은 한국인에게 모스타르는, 아니 도시 이름을 말할 필요도 없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라는 국가명조차 생소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 1973년에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 선수가 중국과 일본을 꺾고 19전 전승의 기록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곳이 유고슬라비아의 도시 사라예보, 그리고 거기서 남서쪽으로 1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가 모스타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그렇게, 모스타르는 보통의 한국인에겐 꽤 머나먼 도시다.

물론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공산당 서기장 티토가 주축이 돼 왕정을 폐지하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 6개 공화국이 모인 ‘연방’ 형태로 수립한 국가 유고슬라비아…. 그러나 티토 사후인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군사적 충돌을 벌이며 독립해 나갔고, 이듬해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가, 2002년에 몬테네그로까지 독립을 선언하며 연방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과정에서 민족과 종교적 차이를 구실로 서로 간에 ‘인종학살’이 자행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참으로 복잡다단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그 ‘결과물’들 가운데서도 유독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그 중에서도 ‘다리 파수꾼’ 혹은 ‘다리의 수호자’를 뜻하는 단어 ‘mostari’에서 따온 이름이 붙여진 작은 도시 모스타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종교 전쟁터라 불리는 발칸반도에서는 보기 드문 화해와 치유의 상징물이 있기 때문이다. 시내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네레트바강의 협곡에 대리석으로 만든 다리가 하나가 그 주인공인데, ‘오래된 다리’라는 의미를 지닌 ‘스타리 모스트’다.

도시 이름마저도 ‘다리’와 관련이 깊을 정도로 스타리 모스트는 오스만투르크가 지배하던 시절인 지난 16세기에 세워진 이래 모스타르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자리매김해왔다. 단순히 역사만 오래된 것이 아니라 중간 교각 하나 없는 우아한 아치가 20미터 높이의 계곡 위에 날렵하게 서있는 모습이 단연 일품이다. 오스만투르크가 자랑하던 토목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다리는 높이 57미터에 길이 4미터, 폭 4미터로 당시까지만 해도 단일 다리로는 발칸반도 뿐만 아니라 유럽을 넘어 전세계에서도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는 그때부터 있던 다리가 아니다. 애초 이곳 사람들은 도시 형성 이래 스타리 모스트를 중심으로 강 양안에 무슬림과 가톨릭 교인들로, 즉 각각의 종교에 따라 나뉘어 살아왔다. 그런데 내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1993년 카톨릭 측의 박격포 공격으로 처참하게 무너져내리고 만 것이다. 강 양안의 축대만을 남긴 채…. 그 충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수도 사라예보에서도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국가 애도의 날’을 선포하고 기렸을 정도다.

두 개의 문자와 세 개의 종교, 네 개의 언어로 뒤섞인 다섯 개의 민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 개의 연방으로 출발했지만 결국 일곱 개의 공화국으로 산산조각 나고 만 발칸반도의 모순을 한 눈에 보여주는 바로미터 같았던 스타리 모스트의 파괴…. 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아쉬움 속에 끝내 잊혀질 뻔했던 한 오래된 다리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내전이 끝난 뒤 전쟁으로 인한 무차별적인 파괴와 무의미하고 잔혹한 유혈 사태를 보여주는 극한의 현장으로서 후대에게 교훈을 주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재건하기로 결정, 유네스코의 지원 아래 재건 사업이 시작되었고 결국 2004년 다시 개통되었다. 이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고, 내전 이전에 유행하던 다리 밑으로의 점프가 다시 시작되었으며 주민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의 왕래도 전쟁 이전보다 활발해졌다.

물론 내전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른바 `인종 청소`라고 불린 학살로 사망한 데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유럽으로 떠나다 보니 모스타르의 분위기가 다소 괴괴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건물 벽면의 총격 흔적이나 민가 사이에 자리 잡은 콘크리트 벙커도 내전의 아픔이 온전히 치유되는 데에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도 하게끔 한다. 특히 그리스정교회 신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스릅스카 지역이 이미 분리 독립해나온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으로부터 재차 독립을 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치명적 갈등이 다시 표면화될 수 있는 소지마저 안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래 전쟁의 직간접 상대자였던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 등을 잇는 도로들이 정비되는 등 전후 복구사업도 궤도에 오르고 있고, 아침 7시면 가게 문을 열어 자정이 넘도록 영업을 계속하는 등 내전으로 뒤쳐진 경제를 호전시키겠다는 주민들의 간절함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모스타르, 나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선 스릅스카 지역의 독립 여부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평화적인 과정을 따를 것이라는 분위기가 읽혀진다.

‘주류’의 시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른바 ‘비주류’의 태도에서도 이해심이 느껴진다. 스릅스카 지역 주민들 역시 자치권만 계속 허용된다면 독립은 당면 현안이 아니라는 양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오랜 기간 발칸반도를 물들여온 피로 얼룩진 전쟁의 숙명도 끝난 것 같다. 70년 가까이 남과 북으로 나뉜 채 왕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이제는 단 하나의 연결고리였던 개성공단마저도 오갈 수 없게 된 한국인들의 사정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