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원폭 투하지 잡감(雜感)

일본 나가사키를 걸으며 만난 상반된 풍경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지난 4월 11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해 원폭희생자위령비에 헌화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원폭 투하에 대한 사과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지만 일본 조야에서는 쾌재를 불렀다는 뉴스도 이어졌다. 머지않은 시기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히로시마를 방문할지 모른다는 보도도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지 70여 년이 흐른 지금, 수상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가해자였던 일본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위해 신경을 쓰는 곳은 히로시마만이 아니다. 직선으로 300여 킬로미터 남서쪽에 위치한 나가사키에 가도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 답게 곳곳에서 상흔을 만날 수 있다. 도시 한 복판에 있는 나가사키 원폭공원과 원폭자료관, 평화공원, 평화기념상 등이 대표적이다.

먼저 원폭공원. 지난 1945년 8월 9일 미군의 원자폭탄이 떨어진 자리에 만든 공원이다. 근처에는 원폭자료관도 있다. 무기화된 원자력, 이른바 핵무기의 가공할 위험성을 고발하는 전시관이다. 또 그 주변에는 평화공원과 평화기념상도 있다. 원폭공원과 원폭자료관, 평화공원과 평화기념상까지, 하나 같이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자세히 둘러봐도 정작 평화로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현재 평화공원이라 불리는 곳은 원래 우라카미형무지소가 있던 자리이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수감돼 있다 비명에 죽어간 현장이지만 그런 내용은 충실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원폭자료관도 그렇다. 왜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엿보이지 않는다.



평화기념상도 마찬가지다. 지난 1955년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西望)라는 작가가 만든 높이 13.6미터짜리 이 동상은 오른손을 수직으로 뻗고 왼손은 수평으로 펴고 있다. 오른손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 덩어리, 즉 원자폭탄을 의미하고,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뜻한다. 살짝 감은 눈은 희생자들에 대한 명복을 비는 의미라고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원자폭탄의 두려움을 알고, 지상에 평화를 유지하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 동상의 근육은 과도하게 부풀려져 있으며, 어깨와 목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위압적인 느낌이 강한 나머지 평화기념상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사실 기타무라 세이보는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며 제국주의를 투사하고 있을 때 수많은 군신상(軍神像)을 만들며 군국주의 선동에 앞장서 복무했던 인물이다. 동상을 만들 때에는 “가능한 한 큰 동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여신은 안 되고 반드시 남신이어야 한다. 크기는 곧 힘”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이 동상이 들어선 1950년대는 조선인이나 중국인 피폭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 피폭자를 위한 원호법도 제정되지 않은 때여서 환자 스스로 병원비와 약값을 해결해야 했던 시대이다. 동상을 만드는 것보다 피폭자 구제가 절실했지만 일본 당국의 결정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나가사키 평화기념상에서 ‘평화를 위한 의지’보다는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현실’, 나아가 ‘군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가 읽혀지는 이유이다.

요상한 광경은 이어진다. 지난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이 터진 상공 439미터 지점의 바로 아래, 즉 ‘그라운드 제로’에는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라는 이름의 기념물을 세워 그 역사를 증언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풍경이 참으로 오묘하다. 기념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종이로 접은 수천수만 마리의 학을 걸어두었는데, 안녕 혹은 평화를 염원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피해자로서의 일본’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아니 그 이전 타이완과 조선, 그리고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침략한 가해자로서의 일본, 그러한 전쟁을 종식시킨 ‘마지막 한 발’로서의 원자폭탄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진짜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 역시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다른 아시아인들에게는 일본의 패전을 앞당긴 것으로 인식되는 원자폭탄이 정작 일본에서는 그런 존재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원자폭탄이 떨어진 자리에 그저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라는 무미건조한 기념비만이 덤덤하게 서있는 걸 것이다.

천황의 이른바 ‘옥음방송’이 있던 때로 부터 약 70년이 흐른 지난해 8월 14일 오후, 나가사키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 기념물 주변에는 “반전”이나 “원폭반대”라 쓴 피켓이 넘쳐 났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싱가포르 샌토사 섬에는 미군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 사진과 함께 “이 폭탄이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원자폭탄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인 아시아 각국 사이에 적잖은 간극이 있다.

하지만 고민이 그 수준의 비판에서 멈추면 안 될 일이다. 일본에서도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아시아 각국에도 서로간의 평화보다는 다른 이들을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일본 내에 직간접적으로 핵무장을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한국에도 그런 이들이 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오카 마사하루(岡正治)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은 그 존재 자체가 상당히 유의미하다.



일본 큐슈의 나가사키는 서양의 제빵기술을 응용해 카스테라를 처음 만든 곳으로 유명한데, 그만큼 일찍부터 서양문물의 유입이 활발했던 도시다. 서양 종교의 유입도 빨라서 일본 내에서 천주교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광범위하게 전파된 곳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서쪽지역인 니시자카에는 도요토미 히데시로부터 도쿠가와 막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를 당한 곳이 있다. 지금도 일본인을 비롯해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차 종종 찾는 곳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언덕길을 따라 2~3분만 더 올라가 보면 어떨까 싶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지난 1995년, 오카 마사하루 목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 있기 때문이다.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목사로 활동했던 오카 마사하루는 태평양전쟁 때 해군 통신병으로 참전한 적이 있는데,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일본과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속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처에 있는 나가사키 원폭기념관이 순전히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의 참상을 알리는 데 집중하고 나아가 일본인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위선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이 원자폭탄을 부르게 된 역사적인 원죄에 대해 먼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이를 위해 오카 마사하루 기념 평화자료관에서는 조선인 원폭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난징대학살 등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벌어진 `가해의 역사`를 가감 없이 전시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대면하기 꺼려하는 자신들의 과오를 직시하게끔 해 반성과 참회를 이끌어내고 나아가 향후 재발할지 모를 비슷한 과오를 막겠다는 의도다. 또 나가사키 원폭기념관에서는 등한시하고 있는 조선인 원폭 피해자를 위한 추모사업을 펼치는가 하면 그들에 대한 실태 조사 보고서를 펴내기도 했다.

몇 년 전 일본에서 <료마전>이나 <언덕 위의 구름>과 같은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전쟁을 일으킨 뒤 패해 버린 쇼와시대 때와는 달리 메이지시대 때는 지극히 평화로웠다`면서 메이지시대를 그리워하는 정서를 담고 있는 드라마들인데, 오카 마사하루 기념 평화자료관은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메이지유신으로 시작된 메이지시대가 일본 입장에서야 `근대화의 시작`을 뜻하는 것이지만 아시아 각국의 관점에서는 `침략과 폭력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고 본 것이다. `평화`라는 말이 마치 알맹이 없는 유행어처럼 변질된 일본에서 오카 마사하루 기념 평화자료관이 지나간 역사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한 이유이다.

개관 이후 지금까지 일본 정부나 기업의 지원은 일절 받지 않은 채 평범한 시민들의 기부와 자원봉사 등을 통해 운영되고 있는 오카 마사하루 기념 평화자료관…. 카스테라나 나가사키 짬뽕처럼 여행 가이드북이나 패키지 여행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지만 나가사키에 들른다면 꼭 한 번 찾아봐야 하는 필수 코스다. 그리고 혹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찾는다면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지 못지않게 방문해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