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 변호사의 흔적을 찾아서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12월 12일은 고 조영래 변호사가 겨우 만 43세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날이다. 정확하게는 1990년 12월 12일이었다. 이 날이야 다 알다시피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가 시작된 날이지만 공교롭게도 1990년 12월 12일은 음력으로 10월 26일이었다. 돌아가신 날짜도 평범하지 않다.

길지 않았지만 그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족적은 정말 어마어마하기에 짧은 이 글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그의 삶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서울대 법대에 조성된 조영래 홀


조영래 변호사는 1947년 3월 26일, 청송에서 대구로 온 조민제와 이남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옥, 순자, 순희 위로 내리 세 딸을 낳은 후에 얻은 첫 아들이었다. 정확히 1년 5개월 후인 8월 26일, 같은 땅에서 전태일이 태어났다. 영적으로 교류하며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봉우리가 된 두 인물은 생전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구 시내를 흐르는 방천은 당시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고 하니 본인들도 모르게 그 때 만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은 가능하지 않을까? 

1957년, 아직 국민학생이던 조영래는 상경하여 수송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종로구청이 들어섰다. 묘하게도 전태일 역시 1954년 어린나이에 상경하여 잠시 남대문 초등학교를 다녔다. 둘 다 순옥이라는 이름의 누이가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어릴 때부터 비범한 면모를 보였던 소년 조영래는 최고 명문 경기중학교에 진학했지만 3학년 때는 출가하려고 안암동 개운사로 ‘가출’을 했지만 3박 4일 만에 귀가하기도 했다. 불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단해서 고등학교 때는 ‘룸비니회’에 들어갔고 나중에는 대학생 불교연합회를 지도하기도 했다. 1960년부터 봉은사에 자주 다녔으며, 법정과 명진 등 고승들과도 많은 교분을 쌓았다.

그의 민주화 운동 ‘경력’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 조영래는 3학년이 된 1964년 자신의 생일날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하여 정학처분을 받았다. 당시 그가 살고 있던 곳도 공교롭게도 4.19 국립민주묘지가 있으며 민주인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수유리였다. 수유리라는 동네 분위기도 어느 정도 그의 성장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경기고등학교는 강남으로 이전한지 오래지만 교정과 교사는 정독도서관으로서 종로구 화동에 건재하다. 그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합격하여 주위의 시선을 한 데 모았지만 “그저 붙었으면 되었지 톱은 무슨 톱입니까.”라는 소감을 밝혀 다시 한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당연히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천재였지만 입학하자마자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다시 참가하여 3개월 근신처분을 받았다. 점차 서울법대 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부상하면서 6.7 부정선거 규탄, 3선 개헌 반대 운동 등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인물을 말하다- 조영래편]

1969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 그의 일생, 아니 수많은 한국 청년들의 일생을 바꾼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었다.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열사의 시신을 인수해 서울법대 학생장을 주선하고 시국선언문을 초안했다. 그 때부터 조영래의 일생은 전태일과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다음 해 3월, 사시에 합격하고 구체적으로 법률가로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4월 어느 날, 그는 <동아일보>에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에 냉담한 사회를 질책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의외로 기고자는 여자 그것도 나이 어린 이화여대 학생이었다! 기특하게 생각한 조영래 변호사는 수소문해서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바로 훗날 조영래의 부인이 되는 이옥경이었다. 5선 국회의원 이미경의 친언니이기도 한 그녀는 이렇게 죽은 전태일의 ‘중매’로 조영래와 맺어지게 된 것이다!

1971년 10월, 사법연수원에서 재학 중인 그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주범 즉 ‘국사범’이 되었지만 1년 6개월 만에 풀려나왔다. 하지만 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었고, 무려 6년 그의 인생의 7분의 1이 넘는 긴 도피 생활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는 이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바로 ‘전태일 평전’의 집필이었다. 전태일 열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기초로 특유의 필력으로 원고는 1976년 가을에 완성되었다. 한국 현대사의 고전이자 수많은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가게 만든 이 책의 저자는 조영래가 아닌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였다. 더구나 한국에서의 출판은 불가능해서 일본에서 일본어로 먼저 나오는 특이한 기록까지 남기게 되었다. 이 책은 원고지 형태로 가제본되어 노동현장에서 교재로 쓰이다가 1983년이 되어서야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90년 개정판이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조영래의 이름을 밝히려 했지만 나오기 한 달 전에 조영래 변호사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이 평전은 30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고 한다. 
이 책의 집필 하나만으로도 그의 도피생활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의 활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5년에는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성사시켜 유신독재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비명에 가자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1980년 1월, 옥인동 대공분실에 스스로 출두하였고, 3월에 사법연수원에 재입소하여 1982년 2월 수료함으로써  정식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가 되고 난 후 그의 활약은 그야말로 초인적인 것이었다. 1984년 10월, ‘망원동 수재사건’을 사실상 원고를 만들어내다 시피하여 5년 10개월간의 법정공방 끝에 사상 최초의 대규모 집단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다. 1985년에는 ‘여성조기정년제’ 사건을 물고 늘어져 또 하나의 역사적 승리를 이끌어 냈다. 1986년에는 일생일대의 변론이었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승리로 이끌어 경장 문귀동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전두환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밝혔다. 코흘리개 시절 조영래는 며칠 동안 유치원에 나갔다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유치원 교사가 ‘가시나’ 여서 유치한 율동 같은 것을 배우기 싫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경상도 남자’였던 그가 한국 여성운동에 금자탑을 두 개나 세운 것이다. 

뿐 만아니라 6월 항쟁의 해였던 1987년에는 ‘상봉동 진폐증 환자 사건’까지 승리로 이끌어 ‘환경권’을 최초로 법적으로 현실화 시켰다. 이런 그의 승리를 도왔던 ‘부사수’가 바로 현 서울시장인 박원순 이었다.       

여기까지 열거한 위업들은 그야말로 그의 대표적인 승리였을 뿐 그 외에도 그가 남긴 일은 많다. 속된 상상이지만 웬만한 변호사라면 그의 업적 중 하나만 이루었다 해도 그것만 우려먹어도 국회의원 3,4선은 문제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삶을 변호하고 지켜주기 위해 변호사에 경기고, 서울대 출신이라는 기득권을 버리고 철저하게 민중들과 함께 불편하지만 아름답고 정의로운 삶을 살았던 조영래는 90년 폐암으로 성모병원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전태일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도 당시에는 명동에 있긴 했지만 같은 성모병원이었다. 그리고 조영래의 무덤은 마석 모란 공원 전태일 열사의 무덤 바로 아래에 있다. 미인박명, 재인박명, 의인박명이란 말이 그처럼 어울리는 이도 드물 것이다. 누군가는 많은 청년들이 《전태일 평전》을 읽고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희생되었기에 그 ‘업보’탓에 요절하지 않았는가하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조영래. 보석처럼 빛났던 이름. …조영래가 가는 곳만 따라다니면 그곳에 진실이 있었고, 정의가 있었고, 승리가 있었습니다. …그가 깃발을 들 날만 기다리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은 이제 어쩌라고 이렇게 혼자 먼저 가버리는 것입니까? 천재가 아니랄까 봐서 이렇게 요절하는 것입니까?”

인권변호사 1세대인 홍성우 변호사의 추도사였다.

“그는 요절한 천재로 기억될 것이다. ‘조변(趙辯)’은 그러나 바보를 존경할 줄 아는 천재였다. …그의 변호에는 ‘작은 진실에의 열정’이 있었고 당해본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보는 눈과 가슴이 있었다. …우리의 조영래는 억울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되었다. 그가 바로 ‘법을 배운 전태일’이었다.”

이 추도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였다. 그의 재능과 성품은 보수인사들조차 감탄시켰던 것이다.

그의 모교였던 서울대 법대에는 유민 홍진기가 지은 15동이 있고 그 건물에는 두 개의 기념홀이 있다. 하나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유민홀`이다. 홍진기는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하에서 판사 노릇을 했다. 해방 직후에는 미 군정청 법제관을 일했고, 이승만 정권 하에서 3.15부정선거를 총괄하다가 4.19로 쫓겨났다가 사면되어 동양방송, 중앙일보 사장을 지냈다. 그의 큰 딸이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다. 2004년 4월 19일, 그 건물 5층에 `조영래 홀` 이 조촐하게 조성되었다. 지금 서울대 법대생들이 닮고 싶은 사람 1위가 바로 조영래 변호사다, 하지만 유민홀과 조영래 홀의 공존은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서울법대생들이 갈 길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는 소사경찰서로 바뀐 당시의 부천 경찰서

한국의 많은 곳에 조영래의 흔적이 남아있다. 대구 방천, 정독 도서관, 수유리 거리, 봉은사, 서울대가 있던 마로니에 공원, 변호사 사무실이 있던 서소문 명지 빌딩... 하지만 그의 3대 승리였던 ‘망원동 수재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상봉동 진폐증 환자 사건’의 무대는 모두 서민들이 살던 별 볼일 없는 변두리 동네였다. 이 동네를 지나가면서 그를 한 번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가 떠난 지 23년이 지난 지금, 많은 이들이 대통령 감으로 생각했던 그가 더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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