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4월. 김상진 열사를 만나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40!! 영원한 고전 <성서>에서 40은 아주 특별한 숫자다. 노아의 방주 때 40일동안 비가 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40일 동안 유혹을 받고 예루살렘 입성 후 40일 만에 죽음과 부활을 맞았다. 물론 40이라는 숫자는 실제로 그 시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한다. 

이러니 40이라는 숫자는 결코 가벼울 수가 없다. 더구나 어느 시인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지만 한국에서 1960년 4월 19일 때문에 4월은 아주 특별한 달이 되었다. 40년 전 4월, 우리나라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당시 우리나라는 박정희가 반대하는 공화당 동지들까지 여럿 쳐내가며 강행한 삼선 개헌안조차 휴지로 만들어 버리고 사실상 나라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신 헌법이라는 극악의 독재체제하에 있었다. 또한 나라 밖에서는 소위 자유 월남이라고 부른 베트남 공화국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었다. 유신체제는 이런 대외적 상황을 명분으로 4년 간 철권통치를 자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민주화 전통을 지니고 있던 학생과 국민들은 계속 숨죽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 힘이 나타나기 시작한 해가 바로 유신의 중간을 지나던 1975년이었다.     

지금은 보수 세력의 대변자 노릇을 하고 있지만, 한 때 언론자유의 상징이던 기자들이 75년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이었다. 수백명의 언론인이 언론자유를 지키려다 거리로 쫓겨나던 때가 1975년 봄이었다. 당시 정부의 <동아일보> 광고 탄압에 대해 시민들의 격려광고가 게재되면서 반독재 투쟁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이 때 서울대 농대 복학생이던 김상진 역시 그 광고를 보고 흥분한 청년들 중 하나였다.   

그해 3월 고려대에서는 설훈, 문학진, 최규엽, 신태식, 신계륜 등이 논의를 시작하여 도천수 비상총학생회장의 주도하에 1,5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독재구국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급기야 4월 8일, 사상 초유의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9일,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해 판결 하루 만에 사형을 집행한다. ‘ 사법 살인’이로 불리운 이 사건은 얼마 전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 판결되었다. 

막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기 시작한 서울대생들도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원혜영, 박우섭, 박인배 등의 첫 시위를 시작으로 관악캠퍼스, 동숭동 캠퍼스로 시위는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3월 28일 수원의 서울대 농대에서도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4월 4일에는 2차 총회 후 300여 명이 수원시내로 진출하여 게릴라 식 시위를 벌였다. 11년 전 6.4 한일회담 반대 운동 당시 서울대 농대생 600여 명은 아침 6시에 발대식을 한 다음에 150리가 넘는 서울까지 도보로 행진하는 놀라운 결기를 보여준 바 있었다. 당시 선배들은 "말라빠진 농민 모습! 이것이 중농이냐", "자유당이 무색하다 부정부패 일소하라" 같은 구호를 수원 시내를 통과할 때도 외치고, 서울을 향해 행진하면서도 외쳤다. 이런 서울대 농대의 전통이 되살아 난 것이다. 하지만 황연수 학생회장과 2차 총회의 사회자이자 체육부장 김명섭이 구속되었다. 

이에 4월 11일 오전 10시 3차 비상총회겸 시국성토대회가 열렸다. 세 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은 열정적인 어조로 학내문제를 설명하고 양심선언문을 읽고 칼로 왼쪽 배를 찌르고 위로 그었다. 아래 글은 양심선언문의 일부이다. 청년다운 열정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한 이성이 잘 조화된 시대의 명문 중 하나다.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인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 (중략)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 (중략)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영원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 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다음 날 오전 8시 55분, 누구보다도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던 청년이 이렇게 이 땅을 떠났다. 열사의 죽음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가져왔고, 유신정권은 5월 13일에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서울대 학우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5월 22일,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속칭 ‘오둘둘 사건’이라고 불리우는 열사의 장례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들 중에는 지금 서울시장인 박원순도 있었다. 그리고 4년 6개월 후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는다. 


  

 열사가 사랑했고 죽음을 맞이한 서울대 농대 수원캠퍼스는 우리나라 근대 농업발전을 선도했던 중이었지만 2003년 관악캠퍼스로 이전 한 뒤 폐쇄되었다. 공교롭게도 전해인 2002년 3월, 농대 본관에서 열사에게 명예졸업장이 수여되었다. 이 곳에 있었던 열사의 추모비 역시 관악캠퍼스로 옮겨졌고, 대신 열사가 쓰러진 그 자리에 기념표석이 만들어졌다. 

현재 서울대 농대 수원캠퍼스에 있는 온실, 묘포관리실, 강의실, 연구동, 기숙사, 학생회관 등 1950년대∼1990년대에 지어진 건물 대부분은 방치되고 있다. 외관은 을씨년스럽지만 한편으로 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열사가 공부했던 강의동, 도서관도 여전히 건재하고,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는 본관은 지금은 서울과학기술대학으로 바뀐 과거 공릉동의 서울대 공대 본관과 거의 유사하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외관은 리모델링한 상태이다.  


과거 농대 학생회관이 앞에 열사의 추모비가 서 있었다 



옛 서울대 농대 본관. 열사의 어머님 박재연 여사가 이 곳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강의동 건물. 관리가 되지 않아 퇴색해 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이 곳은 한국 농업 뿐 아니라 민주화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곳이기도 하다. 최근 대부분의 대학 캠퍼스가 상업화되며 과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요즘, 다른 의미에서 한 번 가볼 만한 곳이기도 하다. 경기도에서 이 캠퍼스를 리모델링해서 사용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김상진 열사의 흔적도 다시 살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꽃피는 4월, 꽃이 지듯 쓰러져 간 한 청년을 기억하는 이들이 다시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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