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6월. 정일우 신부와 상계동을 생각하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한국 민주화 운동 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였던 1987년 6월. 폭풍 같았던 6월 항쟁의 중심은 명동성당이었고, 그 유명한 명동성당 농성을 지켜주었던 한 기둥은 이미 몇 달 전부터 그 곳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상계동 철거민들이었다. 상계동 철거민들은 밥을 하고 빨래를 해주면서 명동성당 농성을 ‘한국 현대사의 전설’ 중 하나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작 ‘상계동 철거’ 자체 그리고 철거민들이 왜 명동까지 오게 된 이유, 마지막으로 그들을 이끌었던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으며 데모 할 때 학생들이 ‘양키 고 홈’을 외치자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는 빼고’를 외쳤던 한 ‘양키 신부’ 정일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공교롭게도 상계동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가 된 폭력철거는 정확히 한 해전인 86년 6월 26일에 일어났고, 정일우 신부가 우리 곁을 떠난 날도 작년 6월 2일 이었다. 

정일우 신부의 본명은 존 데일리 John Daly. 1935년 11월, 미국 일리노이주의 아일랜드 가정에서 태어났고, 1953년 8월, 예수회에 입회했다. 그는 1960년 9월 21일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이 때부터 반세기가 넘는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는 서강대에서 교수로 교편을 잡다가 3년 후 귀국하고 66년 6월 사제 서품을 받고 정식 신부가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일우는 한자로 정일우 鄭日佑 인데, 이름 존이 정과 비슷해서 정을 성으로 삼았고, 데일리라는 이름이 날 ‘일’과 비슷해서 ‘일’자를, 그리고 돕는 다는 의미의 ‘우’ 자를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정일우 신부


1969년 9월,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이 경찰들에게 무자비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단식과 일인 시위에 들어갔다. 가슴에 “대한아 슬퍼한다. 언론자유 시들어 간다!” 라는 글을 써 붙인 상태로 말이다. 미국인 신부의 일인 시위는 상당한 주목을 받았고 추방당할 뻔 했지만 ‘예수회 빽’으로 다행히 추방만은 면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그는 ‘입으로만 복음’을 달고 살았다고 느끼고 민중들의 삶 그것도 가장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상류층 여학교의 교사를 하다가 캘커타의 빈민가로 간 마더 데레사 성녀와 비슷하게 겹쳐보인다.

1973년 11월, 정일우 신부는 한양대 뒤편 송정동 판자촌으로 들어갔는데, 먼저 들어가 있었던 9살 아래의 한 청년을 만났다. 바로 그와 지음의 관계가 될 서울대 제적생 제정구였다. 그가 그 살벌했던 1970년 초반에 ‘똘기’ 충만한 젊은 운동가 제정구를 만난 사건은 누구의 표현대로 우연을 가장한 역사적인 부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뒤로 둘은 양평동, 목동, 상계동에서 함께 고락을 같이 나눴으며, 그들이 이끌었던 한국 도시빈민 운동과 철거반대 운동 그리고 그 대안인 공동체 마을 건설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을 맡았다.

청계천과 양평동, 목동 그리고 경기도 시흥에 만든 한독마을과 복음자리, 목화마을에 대한 이야기는 저번에 올린 ‘제정구의 도시를 가다’와 ‘양천벌의 전쟁 : 목동철거민 투쟁의 현장을 가다’에서 어느 정도 다루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상계동 투쟁을 중심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두 대회를 앞두고 외국인들의 눈에 ‘거슬리는’ 판자촌들을 철거하기 위해 1985년부터 서울 특히 외곽 지역에서는 거의 매일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최악의 폭거는 1986년 6월 26일, 상계동 173번지, 지금의 상계역 바로 옆 벽산아파트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의 상계동 173번지

그 때의 처참한 현장은 흔적조차 없다. 

경찰 백골단과 용역 깡패들은 그야말로 무차별 폭행을 자행하여 아이들을 공중에 던졌으며, 현장에 있던 수녀들의 가운을 벗기고 머리채를 잡고 끌어냈다. 상계동 성당의 손인숙 수녀가 김수환 추기경께 전화를 걸어 직접 오시기까지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 날부터 정일우 신부는 세면도구만 들고 그 곳에 텐트를 치고 살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이 그냥 함께 사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보통 일주일에 작으면 세 번, 많으면 네 번 공격을 가해왔고, 정 신부의 성경책까지 불타고, 철거민들이 만든 나무 십자가까지 박살이 났다. 오동근 어린이를 비롯한 세 명의 희생자까지 나왔지만 언론의 무관심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이 만든 <상계동 올림픽>이 그들이 할 일을 조금이나마 대신해 주었다. 철거민들의 보루가 된 상계동 성당 지하 강당에서는 천주교도시빈민위원회가 재개발 정책의 허구성과 문제점 그리고 세입자 대책 등을 교육하면서 ‘이론 무장’을 맡아 주었다. 


당시 철거민들의 근거지였던 상계동 성당


철거민들의 투쟁은 겨울을 넘어 봄을 맞이했다. 그 사이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고, 전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지만 전두환은 4.3 호헌조치로 사실상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그의 별명처럼 상계동과 양평동의 판자촌 아니 천막촌에 대한 ‘싹쓸이’에 나섰던 것이다. 트럭 수십대가 천막은 물론이고 살림살이까지 싣고 사라져 버렸다. 결국 상계동 주민들은 명동성당에서 반은 농성, 반은 일상인 천막생활을 시작했다. 

자기 땅 한 평 없어 쫓겨나야 했던 그들이 한국에서 가장 비싼 평당 1억원 짜리 땅에서 ‘사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6월 항쟁의 꽃이라고 불렀던 명동성당 농성 기간 동안 철거민들은 시위대에게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며 잠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정 신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양주의 배 밭으로, 부천의 고강동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들의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고강동이 올림픽 성화가 지나간다는 이유로 뼈대를 세운 가건물을 철거해서 그들은 땅굴을 파고 살아야만 하는 기막힌 경우를 당하고 말았다. 올림픽 성화가 그 곳을 지나가는 시간은 5분도 되지 않았다. 

 지난 2008년, 북경 올림픽 직전, 중국 정부는 성화가 지나가는 길 주변의 빈민가를 철거하거나 높은 담장을 쳐 그 모습을 외국 언론의 카메라로부터 차단했다.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언론들도 그런 행태를 두고 비웃었다. 하지만 그 언론들은 1988년 전, 당시 우리나라 아니 자신들과 같은 행정구역인 서울에서 일어난 일, 자신들의 언론사에서 한 시간도 안 되서 갈 수 있는 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원조가 바로 우리나라인데 말이다. ‘유체이탈화법’은 정치인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되며, 또한 일본에게 잘 쓰는 이 말을 우리 스스로에게도 적용해 봐야 할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그 후에도 도시 빈민들을 위해서 일하다가, 그리고 1994년부터는 농민공동체에서 이 땅의 민초들과 함께 했던 정일우 신부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6월 2일, 뜨거운 태양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억하는 150여 명이 전국에서 각지에서 출발하여 그가 묻힌 용인 성직자 묘역에 모였다. 추모미사의 《성경》 <지혜서>의 구절은 이러했다.  

- 의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실험하시려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는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의 금처럼 그들을 실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