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7월 9일 그리고 새롭게 단장한 한열 동산.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1987년 6월 9일 오후2시, 1천여 명의 연세대생들이 총학생회가 주최한 ‘구출학우 환영 및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도서관 앞 민주광장에 모여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광주 출신 이한열 열사였다. 학생들은 집회를 마친 뒤 교문 앞으로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고, 교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전투경찰과 부딪혔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학생들을 향해 수많은 최루탄이 발사되었다. 최루탄은 사람이 아닌 공중을 향해 발사되어야 하는데, 탄이 허공에서 터지거나,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야 사람들이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날은 어느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직접 쏘았다. 그리고 그 탄은 직선으로 날아가 열사의 머리를 맞고 터지고 말았다. 시간으로는 오후 5시였고, 쓰러진 장소는 연세대학교 오른쪽 교문(교정에서 교문을 향한 방향)에서 학교 안으로 50cm~1m 가량 떨어진 지점이다. 이곳은 2012년 25주기에 피격지점에 기념 동판을 설치할 예정이었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사로 연기되었다. 교문도 공사 대상이 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연세대학교 정문 근처에서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이한열 군 (1987.06.09)



이한열 열사는 1966년 8월 29일 전남 화순군에서 농협 직원이었던 아버지 이병섭씨(작고)와 어머니 배은심씨 사이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 동성중학교와 진흥고등학교 재학시절 성적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지도력과 친화력도 인정받아 고교 3학년 때는 총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예술과 문학을 사랑해 많은 시와 일기를 썼던 그는, 전문경영인의 꿈을 지닌 평범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재수를 거쳐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자, 사진과 비디오를 통해 80년 광주항쟁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광주항쟁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는 부모님이 막아 집 마당에조차 나가보지 못했다. 광주에 있었지만,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광주항쟁에 대해 제대로 보거나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광주의 진상을 알게 된 후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사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족주의연구회’라는 동아리(나중에 ‘우리경제연구회’와 합쳐져 ‘만화사랑’이 됨)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2학년이 되어서는 동아리 활동뿐 아니라 경영학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위에서는“평소에는 말수가 적어 과묵한 편이었지만, 한번 입을 열면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뚜렷하게 전개해 토론을 이끌곤 했다”고 회고했다. 

6월 10일은 민정당의 전당대회 즉 노태우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규탄하고 저지하기 위한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회의’가 열리는 날로서 연세대의 집회는 그 전초전 격이었다. 그 날 오후에 열릴 집회를 앞두고, 이한열은 학생회관 3층에 있는 만화사랑 동아리방에 운명처럼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피로 얼룩진 땅. 차라리 내가 제물이 되어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

운명처럼 그는 그 글을 쓴 후 몇 시간 만에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몸에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몸을 발작하듯 떨었고, 뒷머리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즉시 동료 학생들에 의해 교문 옆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자신을 업고 가는 동료들이 땀을 비오듯 쏟아내자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할 정도로 여유를 부리기도 할 정도로 의식이 또렷했지만 30분 쯤 뒤 호흡장애를 일으키고 온몸의 신경이 마비돼 신경외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 였고, 그 후로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학교에서는 이한열군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내과, 외과, 신경외과 등 전문의 12명으로 종합 의료진을 구성했고, 학생들은 수십 명 씩 경비조를 짜서 경찰의 병실접근을 감시하며 병상을 지켰다. 87년 1월에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경우, 경찰이 고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화장을 한 뒤 뼛가루만 그 아버님께 전했던 것처럼 이한열도 숨을 거두면 시신을 빼앗길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비조에는 놀랍게도 일반 학생들과는 거리가 있었던 축구부원들도 참가했고, 100kg이 넘는 거구의 아이스하키 부원 백성기가 이한열 부모님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87년을 여는 1월에 산화한 박종철 열사가 6월 항쟁의 문을 열었다면 이한열의 피격은 거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다음 날 그가 가고자 하는 시청으로 수십만의 학생과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14개 도시에서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이한열의 회생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집회가 개최되었고, 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의 공개사과와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같은 열기가 모여 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민주당, 민추협, 종교계 등이 주도한‘6.26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졌다. 이 날 130만 명의 많은 시민들의 참여 속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다. 결국 정권은 호헌을 철회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이한열은 이 열기를 직접 몸으로 느껴보지 못했지만 뇌사 상태에서나마 이 나라의 민주화에 힘을 보태려는 듯 결국 6월 항쟁을 끝까지 비켜보고 피격 27일 째인 7월 5일까지 버티었다. 그는 그 날 오전 2시 5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메모처럼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하늘 위로 날아오른’ 것이다. 22세였다.....

장례가 열리기까지 나흘 동안 전국에서 8만 여명의 조문객이 연세대 교정을 찾아와 애도했다. 7월 9일, 연세대 교정에는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에 참석하기 위해 시민, 정치인과 재야단체 회원 등 7만 여명이 모였으며 만장은 숲을 이루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많은 저명인사들의 추도사가 있었지만 가장 압권은 바로 전날 진주 교도소에서 출감한 문익환 목사였다. 그가 정문에 들어서자 ‘모세의 기적’처럼 군중들은 갈라져 길을 내주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이고 “전태일 열사여!”부터 시작되어 박종철과 이한열로 끝난 그의 처절한 연호는 한국 대중 연설 중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어느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군중들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열사의 운구행렬은 연세대에서 시청 앞까지 이어졌고, 백만 명이 넘는 추도행렬이 그가 가는 길을 배웅했다. 6월 10일, 그렇게 시청 앞으로 가고자 했던 이한열은 그렇게 그 곳으로 갔고 세 살 때부터 자라난 광주 망월동의 5 ·18 묘역에 묻혔다. 


옛 추모비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고 1년 뒤인 1988년 9월 14일, 연세대학교 총학생회는 뜻있는 이들의 성금을 모아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위치는 학생회관 남쪽의 작은 동산, 지금은 ‘한열동산’이라 불리는 곳인데, 그가 활동했던 상경관, 중앙도서관, 학생회관 그리고 그가 쓰러진 정문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추모비에는 “여기 통일 염원 43년 6월 9일 본교 정문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다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 님을 추모하고자 비를 세운다”는 취지문과 함께 조각가 김봉조의 ‘솟구치는 유월’ 이라는 작품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한열 열사가 남긴 시도 새겨졌다. 

 


그대 가는가
어딜 가는가
그대 등 뒤에 내려 깔린
쇠사슬을
마저 손에 들고
어딜 가는가
이끌려 먼저 간
그대 뒤를 따라
사천만 형제가 함께
가야하는가
아니다
억압의 사슬은 두 손으로 뿌리치고
짐승의 철퇴는 두 발로 차버리자
그대 끌려간 그 자리위에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올해도 어김없이 6월 9일을 맞이하여 연세대학교에서 이한열 열사 추모제가 열렸지만 올해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한 추모비가 보존 작업을 걸쳐 연세대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추모비가 아닌 기념비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한열 추모비는 왜 기념비로 바뀌게 된 것일까?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이유는 27년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자리를 지켰던 이한열 추모비 자체의 내구성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1988년 당시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조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이 물건은 태생적으로 실외공간에서 오랜 세월을 버티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이한열 기념사업회에서 새로운 비가 이한열 개인에 대한 추모를 넘어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과정의 헌신과 희생들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확대하기 위해 기념비로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말은 이한열 열사의 상징적 가치를 관성적인 생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대중적인 가치로 승화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2015년 6월 4일. 한열 동산에 기념비가 올라가고 있다. @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 기념비


새로운 이한열 기념비는 충남 보령에서 가져온 육중한 오석을 높이 약 1.4m, 길이 약 4.5m로 다듬어 만든 데다가 세로로 만든 추모비와 다르게 가로로 넓고 길게 뻗어있다.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듯 현대 미술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기념비 앞의 표석에 내장된 전자시계 역시 지금이 2015년임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 기념비 전면에는 `198769757922`라는 숫자와 의미를 설명한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이 숫자는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1987년 6월 9일, 사망일인 7월 5일, 국민장이 치러진 7월 9일, 당시 그의 나이 22살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는 열사의 추모비와 기념비가 한열동산에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지 않을 까 싶지만 물리적인 어려움을 알고 있는 이상 아쉬움으로 남길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전의 추모비와 비교하면 이한열 기념비가 그 전에 비해 한열동산에서의 존재감이 강해졌으나 위압감은 없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은 든다.

마지막으로 새삼스럽고 한심한 표현이지만 열사가 간지 거의 한 세대인 28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은 이한열 기념관에 새겨져 있는 한 구절 “6월 민주항쟁으로 우리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수립되었다” 보다 얼마나 나아갔는지 답답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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