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의 발자취를 찾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작년 대선에서 인혁당 사건이 화제에 오르면서 ‘사법살인’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했다. 지면상 ‘사법살인’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불행하게도 인혁당 사건에서 희생된 8명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 전에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있었고, ‘원조’는 바로 1959년 7월 31일, 첫 번째 사법살인의 희생자가 된 죽산 조봉암 선생이었다. 

조봉암 선생은 1898년 9월 25일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한반도는 외세의 침략이 잦았지만 그 중에서도 강화도는 상징적 장소였다. 몽골의 침략, 만주족의 침략은 물론 근대에 와서 병인, 신미년에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겪고, 결국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 문을 연 장소가 되고 말았다. 또한 강화도는 집권 세력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했다. 집권 노론이 주자의 공자 해석만 옳다고 생각하는 성리학에 빠져 있을 때, 왕양명의 해석을 공부하는 소수파들이 강화도에 살고 있었다. 양명학은 `지행합일(知行合一)`, 즉 `아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라`는 가르침이었다. 청년 조봉암은 1919년 3월, 강화도 만세시위에 참여하면서 서대문 형무소에 1년 동안 수감된다. 그 뒤 많은 독립투사들이 거쳐 갔고 당시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이끄는 YMCA에서 공부했다. 이상재와는 훗날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사장과 기자로 재회하게 된다. 선생은 사회주의자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한인공산당의 통합에 실패하자 모스크바로 가 그 곳 동방 노동자 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3년 9월 귀국해 이듬해 4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에 참여, 문화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1931년 6월 상해에서 일본 관헌에 체포됐고 이듬해 12월 7년형을 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후 일제의 감시 아래 인천에서 미강조합 일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지면 관계상 선생의 독립투쟁경력을 더 길게 설명하기는 어렵고, 선생의 묘지 연보비에 새겨져 있는 선생의 어록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나 -  

선생은 놀랍게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농림부장관에 취임하면서 이승만과 손을 잡는다. 이는 지금도 종로구 이화동에 건재한 이화장 조각당에서 이승만과의 독대 끝에 이루어졌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선거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초대 농림부장관이라니… 이렇게 이승만은 선생을 농림부장관에 기용함으로써 민주정부라는 포장과 함께 농지개혁을 둘러싸고 한민당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봉암 장관이 추진한 농지개혁은 이승만 정부의 몇 안 되는 업적 중 하나인데, 한민당의 기반인 지주세력의 약화를 가져오는 효과를 거두었고, 선생은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조봉암 선생의 ‘놀라운 변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49년에는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친일파 윤치영과 상공부장관을 지낸 임영신이 주도한 친 이승만 제헌국회의원모임인 ‘이정회’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50년에는 이승만 지지를 내건 대한국민당 의원단에도 이름을 올린다. 한국전쟁이 발발 당시 국회부의장이었던 선생은 이승만이 혼자 대전으로 도망갔음에도 차분하게 뒷수습을 한 후 한강을 건넜는데, 대전에서 만난 이승만은 “나는 자네가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라면서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선생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에도 이승만의 ‘발췌개헌’에 동의하도록 막후에서 의원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하여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 시기 선생의 이러한 ‘변신’은 긍정적인 평가도 받는데, ‘이상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탁월한 현실 정치인 조봉암의 면모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어쨌든 1950년대 초 선생의 정치역정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이런 공적과 ‘오점’을 떠나 조봉암 선생이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는 것은 한국전쟁이 후 처음으로 ‘평화통일’을 전면 즉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의 중심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1953년 휴전 이후, 이승만 정부에게 북한은 때려잡아야 할 대상이었지 대화의 상대가 아니었다. 더구나 평화통일은 북쪽에서 쓰는 용어였기에 금기시 되었던 것이다. 죽산은 수백만표를 얻었고, 이승만은 반드시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간첩 혐의로 구속된 후 검사가 이를 문제시 하자 죽산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북한에서 평화통일이란 말을 쓴다 해서 우리도 쓰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말이 안 된다. 북한에서 ‘밥’이라고 한다고 우리가 ‘밥’을 죽이나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승만은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판사들을 압박했고, ‘법’의 힘을 빌려 강력한 정적을 제거한다.  

- 나는 이 박사(이승만)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 

죽산은 죽음의 순간에도 `내 억울하게 죽으니 후세가 내 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하지 않았다. 1959년 7월31일, 교수형에 처해지고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 당국의 허락을 받은 20여 명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졌다. 약관의 나이에 첫 감옥살이를 한 서대문 형무소에서 최후를 보내게 된 선생.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장 시설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일본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일본의 법학도나 법조계 관계자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주검은 망우리 묘지로 옮겨졌고 봉분도, 묘비도 없이 묻혔다. 마치 안창호 선생이 망우리 묘지에 묻혔을 때 일본 순사가 무덤을 지켰던 것처럼 말이다. 조선시대 역적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게 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물론 다음 해 4.19가 일어났으니 독립운동가에 건국의 주역인 죽산이 이 나라에 남긴 공적만으로 비석 하나는 가득 채울 수 있겠지만 유족들은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는 그 날을 위해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되면서 죽산의 억울한 죽음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91년에는 여·야 최고위원과 국회의장 등 90여 명에 가까운 국회의원들이 청원운동에 서명했다. 그 쯤 현재의 묘비가 세워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2m가 넘는 큰 비석의 앞면에는 단지 `죽산조봉암선생지묘(竹山曺奉岩先生之墓)`라고 새겨져 있을 뿐 비석 좌우 뒷면에는 아무런 글을 새길 수 없었다. 보통 이 정도의 인물, 이 정도 크기의 비석이라면 생몰년과 경력, 그리고 추모의 글이 가득한 게 보통이다.

앞서 소개한 묘지 입구의 연보비를 훑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1898-경기도 강화군에서 출생, 1919-3·1 독립운동 가담 1년간 복역, 1925-`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로 모스크바 코민테른 회의 참석, 1930-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복역, 1946-조선공산당과 결별. 중도통합노선 제시, 1948-제헌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역임, 1950-국회부의장 역임, 1952-제2, 3대 대통령 출마, 1956-`진보당` 창당 위원장 역임 및 평화통일 주창, 그러나 `1959-간첩혐의로 사형` 라고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아무도 죽산을 간첩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현재 진행형으로 남겨놨던 부분에는 `-??? 년 무죄판결, 독립유공자 서훈`을 넣어야 할 것이다. 결국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내렸고 현재 독립유공자 서훈을 기다리고 있다. 건국훈장이 추서되고 강화도에 기념비는 세워졌지만 생가도 복원되어 그야말로 완전한 복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망우리 묘지는 1991년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시로부터 관리 업무를 인수받아 1998년 공원화 작업을 마친 이후 현재의 `망우리공원`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성묘객 보다 산책과 등산을 즐기는 시민들이 더 많다.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에서 50m쯤 올라가면 순환로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에서 왼쪽 길로 1㎞ 정도 걸어 올라가면 길 좌우로 유명인 묘소 입구에 서 있는 연보비가 나타난다. 동락천 약수터를 지나 한용운 선생 묘 다음에 죽산 조봉암의 묘가 있다. 입구에는 연보비가 서 있고 계단도 만들어져 있다.

조봉암 선생과 만해 한용운 선생. 두 분 다 이념을 떠나 일제와 최일선에서 맞서 싸운 지사들이라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지만 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데 놀랐다. 만해 선생은 광복 한 해 전 인 1944년, 죽산 선생은 4.19 한 해 전인 1959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안타까운 우연의 일치겠지만 하늘이 무심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가실 때도 안타깝게 가신 두 분, 하지만 지금 우리를 보고 편하게 영면하시고 계실까? 망우(忘憂)는 아이러니하게도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