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생 피습사건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갔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마산 의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국회 앞에서는 물리적 진압이 없었다. 평화적 시위를 마친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청계천 4가를 지났다.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갑자기 무기를 든 한 무리의 청년들이 나타나 학생들에게 돌진했다. 경찰의 지시를 받은 반공 청년단원들이었다. 정치깡패들의 무차별 테러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길바닥에 쓰러졌다.

흡사 숨이 끊어진 듯 보이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이 사건은 동아일보 1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는 테러를 당한 학생 중 한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오보였다. 한 학생이 생사를 오가는 중태에 빠지긴 했으나, 천만다행 으로 회생했다. 고려대 80학번인 홍기원(48세) 씨는 이것을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오보’라고 평가한다.

 3.15마산의거를 시작으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 로 일어났고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던 무렵 고대생 피습사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에 불을 당긴 격이었다.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4.19혁명이 도래한다.


안암동에서 수유리까지 이어진 묵언의 시위 
해마다 4월 18일이 되면 고려대에서 4.19묘지까지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1969년부터 개최한 행사는 올해로 39회째를 맞는다. 지금에 와서야 그 상징적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참여 학생 수도 줄고 말 그대로‘달리기 대회’가 되었지만 4.18에 대한 고려대 학생들의 자부심은 매우 컸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정권의 부정과 불의에 맞선 시위는 고등학생들 몫이었다. 대구 2.28학생의거도 3.15마산의거도 고등학생들이 주축이었다.

언론 통제가 심했던 1980년대와는 달리 당시에는 언론이 살아 있었다.‘ 미국 물’을 먹은 이승만은 자유주의를 신봉했으므로 어쨌거나 언론은 통제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고등학생들도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