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업회가 2008년 발간한『그날 그들은 그곳에서』(다시 가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에 실렸던 글입니다. 10월 16일 부마항쟁기념일을 맞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 부산 ‘민주공원’과 부마민주항쟁의 기억들

 

글 원종국





<메인사진> 당시 남포동 시장 상인들은 유신 독재에 항의하며 시위대와 합류했다. 

이곳은 골목 골목이 많아 시위자들에겐 적전지의 요소였다고 한다. 

현재는 부산국제영화제로 유명해지면서 피프(PIFF) 거리로도 불린다

 



부산 민주공원과 민주항쟁기념관



부산은 파도의 도시다. 때로 그 파도는 노도(怒濤)가 되어 한반도 전역을 일렁이게 했고, 마침내는 독재자를 쓰러뜨리는 해일(海溢)이 되기도 했다. 60년 4월혁명과 79년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87년 6월항쟁이 모두 그러했다.



2002년 10월 19일, 노구의 해외 민주화 인사들은 버스에서 내려 부산 ‘민주공원’ 계단을 올랐다. 국립 5․18묘지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들은 ‘한국민주화운동 사료전시회’의 개관을 앞두고 간단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하비 목사는 “외관상 이미 한국의 민주화가 확고하게 굳어진 듯 보이지만, 민주화 투쟁은 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슈미트 목사가 “한국인들은 독일의 나치 시절보다도 훨씬 강도 높은 민주화 운동을 했지만, 통일에 대한 헌신이 예전의 민주화 운동보다 못한 것 같아 아쉽다.”고 받았다. 그러자 오글 목사를 비롯해 간담회에 참석한 민주화 인사들은 이제는 ‘통일운동’에 매진해야 할 때라며 이구동성 입을 모았다. 특히 슈미트 목사가 “독일은 지식인과 정부 관계자들이 앞장서 꾸준히 통일운동에 헌신했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해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밖에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데, 우리는 왜 안에서 더 갈팡질팡 싸우고 있는 것인지.



사료전시회의 개관식이 끝나고 난 뒤 민주화 인사들은 둥글게 이어진 복도를 오르내리며 ‘민주항쟁기념관’의 내부를 둘러본다. 원통 모양으로 만들어진 기념관은 오르내림틀(엘리베이터;민주공원에는 대부분의 명칭이 순우리말로 적혀 있다)로 둘러보는 것보다 용수철처럼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걸어서 오르내리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민주화 운동의 기나긴 노정처럼 이어진 길은 기념관 중앙에 만들어진 상징조형물 ‘민주의 횃불’을 감싸고돈다. 그렇게 올라가면 둘째겹(2층)에는 ‘늘 펼쳐 보임 방’(상설 전시관)이, 셋째겹에는 ‘잡은 펼쳐 보임 방’(기획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사진-전경1> 민주항쟁기념관을 통해 관람객들은 부산의 과거와 현재, 

한국의 민주화 여정을 둘러보게 된다.




‘늘 펼쳐 보임 방’에 들어서면 순서대로 ‘돌이켜 보는 숲, 가마뫼의 큰 외침, 펼침의 그물, 함께함으로 태어남, 이음의 자리, 넋 기림 방, 비췸마당, 바람의 방’ 등을 거쳐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관람자들은 부산의 과거와 현재를 비롯해, 한국과 해외의 민주화 여정을 자연스레 둘러본다. 석고인형으로 만들어진 과거는 어린이들에게도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오고, 예전에 보았던 사진이나 영상, 몰래 학습해야 했던 불온서적(?)들도 함께 전시되어 옛 기억을 오늘까지 연결시킨다. 우리 이웃이거나 동지였던 사람들의 흔적 앞에서 관람자 입장으로 마주 선 우리는 눈시울을 붉히거나 한동안 못 박힌 듯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부산(釜山)’의 지명은 본래 부산시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이 가마솥(釜)처럼 생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 때문인지 부산 사람들은 비록 쉽게 끓지 않지만 한번 달아오르면 그 열기가 자못 대단했다. ‘가마뫼(釜山)의 외침’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되는 알림판이 붙어 있다. “우리가 일어서면 바뀐다. 부산 시민과 경남 도민은 독재 권력이 발호할 때마다 그 어느 곳보다 앞서 저항의 깃발을 일으켜 세워 민주항쟁의 물꼬를 트거나 전국적 항쟁의 촉발제가 되는 역할을 해옴으로써 민주항쟁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라고.



대체로 민주항쟁기념관은 비디오 혹은 멀티미디어 세대로 불리는 신세대들에게도 친숙한 볼거리와 느낄거리들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부산 지역에서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온 송기인 신부의 말에 따르면, 민주공원은 “시민들을 민주시민으로 교육하고 후세들에게도 민주주의를 훈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서, ‘제주 4․3공원’도 여기서 힌트를 얻었을 정도로 잘 정돈된 지구 최초의 민주공원”이란다. 그는 이어 부산 시민의 민주화 역량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부산 시민은 좀체 반응이 없기로 유명합니다만, 뜻이 맞았을 땐 다른 어느 지역도 따라갈 수 없는 폭발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신 때도 다들 조용한 것처럼 보였지만, 한번 터지고 나니까 태풍 만난 파도처럼 민주화의 힘으로 합쳐지지 않았습니까?”






<사진1> 부산대학교 내 10.16기념관. 학생들에게 부마항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도록 이름을 부쳤다. 

예술,문화 공연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와 남포동 일대



72년 궁정 쿠데타로 출발한 유신 체제는 국가 안보를 내세워 입법부와 사법부를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시켰다. 이어 박정희는 74․75년의 긴급조치들로 폭압 정치와 장기집권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의 유신 체제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청년 지식인들을 자괴감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정의니 진리니 원칙이니 하는 것들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74년 이후 5년간 단 한 번의 시위도 없었던 부산대는 당시 ‘유신대학’이란 오명 속에 있었다. 그리하여 79년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의 시작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애타게 도화선에 불이 붙기를 갈망했던 부산 시민들의 심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79년의 부산은 그야말로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21일 부산의 민주공원을 다시 찾은 필자는 79년 당시 부산대 아카데미회 회장을 맡으면서 부마민주항쟁을 주도했던 김종세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중부교회’와 ‘양서협동조합’ 등을 통해 시위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고, 10월 초부터는 문창대(부산대 약학대학 앞쪽의 바위) 등지에서 사람들을 만나 정세 분석을 했으며 공대 이진걸 씨와 법대 신재식 씨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시위 계획도 잡혀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이진걸 씨와 그의 친구 황선용․남성철 씨는 1979년 10월 15일 <민주선언문>을 제작해 본관과 도서관에 돌렸다. 당시 도서관의 책상마다에는 분위기를 잡기 위해 조직원이 한 사람씩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이끌고 도서관 앞으로 나왔을 때는 시위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단정하고 이진걸 씨 등이 학교를 빠져나간 직후였다. 뒤늦게 나온 학생들 저마다의 가슴은 안타까움으로 들끓었는데, 이는 오히려 다음날 시위를 더욱 가열차게 진행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10월 16일 10시. 경제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광민 씨는 인문사회관 306호 강의실에 <선언문>을 뿌리며 마침내 부마민주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40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도서관 앞에 모였을 때는 200여 명, 사복경찰의 기습에 자극받아 1천여 명, 그리고 ‘독재 타도’와 ‘유신 철폐’를 부르짖으며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 때는 어느새 7천여 명의 성난 파도가 되어 있었다. 일단의 학생들이 구(舊)정문의 담을 무너뜨리고 가두 진출에 성공하자 학생들은 노도같이 시청으로 남포동으로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사진 민주공원023>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고 있는 부산대학생들




그 다음부터는 학생들만의 시위가 아닌 부산 시민 전체의 민중항쟁으로 연결되었다.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 모인 3~5만의 인파는 이후 남포동, 창선동, 광복동, 충무동 일대의 골목 골목을 돌며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목청껏 외쳤다. 이렇게 시작된 부산의 시위는 18일까지 이어졌으나, 17일 자정을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 부대가 진주하면서 사흘에 걸친 부산 지역의 민주항쟁은 끝났다. 그러나 그 날의 함성은 아주 끝난 것이 아니라 이웃한 도시 마산으로 항쟁의 불길을 옮겼다. 그리고 이는 26일까지 이어져 부마민주항쟁을 직접 보고 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함으로써 유신 체제의 종말까지도 이끌어냈다.



10월 19일 연행되어 동래경찰서 형사다이얼실에 있던 김종세 씨는 아침 밥상을 덮어놓은 신문을 보고 ‘박정희 서거’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저는 볼펜심에 편지를 말아 내보내 학교 후배들과 소통을 하곤 했었는데, 구류를 살고 나가는 상인에게 주었던 편지가 경찰에 근무하던 그의 동서에게 전해지는 바람에 대공계까지 끌려갔었습니다. ‘박정희가 죽었다고 우리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는 문구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을 당한 거죠. 사실은 유신 체제나 매판자본세력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싸움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당시의 민주항쟁을 북한과 연관시키려는 음모 때문이었을 겁니다.” 북한을 들먹여 정권을 연장시키던 박정희 정권의 수법은 그가 죽고 난 뒤에도 계속 이어졌던 셈이다.



 




<사진2 > 1979년의 부산 분위기는 마치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화약고 같았다. 

그만큼 시민들 내부로부터의 저항이 싹 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10.16부마민중항쟁탑.


 



2002년 부산대학교 교정과 PIFF 광장



“청년 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부마민주항쟁 당시 정광민 씨가 작성해 뿌린 <선언문>의 시작은 이러했다.



김종세 씨의 조언에 따라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부산대학교를 오른다. 부산대학교는 30여 개 동의 건물이 빼곡한 매머드 국립대학교이다. 한참 동안 안내판을 둘러보지만, 어디에도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흔적은 없다. 항쟁이 시작된 옛 도서관 자리(현재는 과학도서분관으로 쓰이는 ‘자율도서관’) 앞에 있다는 ‘부마민주항쟁 발원지 표지석’을 학생들에게 물어 보지만, 시계탑을 돌고 독수리상을 지나 자율도서관 아래 계단에 당도할 때까지 필자는 발원지 표지석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학생을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간신히 자율도서관을 찾아 아래 계단을 올라서니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오른편에 신영복 선생이 글을 쓴 ‘부마민주항쟁 발원지 표지석’이 있다. 아! 이곳에서 부마민주항쟁의 불씨가 타올랐구나! 99년 10월 16일에 세워졌다는 표지석에는 ‘유신 철폐 독재 타도 - 민주주의 신새벽 여기서 시작하다.’라고 씌어져 있다. 그러나 자꾸만 이 상징물이 왜소해 보이는 건 왜일까? 크기 때문만은 아닐 터. 학교 홍보실에 물어보니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치르는 부마민주항쟁 관련 행사는 아무 것도 없단다. 게다가 총학생회 차원에서 축제 때 치르던 행사들도 2년 전부터는 자취를 감춘 모양이다. 부마민주항쟁의 발원지는 그저 그 자리만을 쓸쓸하게 알려 줄 뿐이다.


<사진3> 부산대학교 구 도서관은 시위대들의 집결지였다. 

이 도서관이 헐리면서 기념비도 철거 될 예정이다.


 



당시 7천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돌았다는 대운동장에는 ‘제11공학관’과 ‘대학본부동’이 반쯤 차지하고 들어서 있다. 23년 전 부산대 선배들은 이 운동장을 돌며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소리소리 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최루탄에 눈물콧물 쏟으며 구 정문 옆의 담장을 넘어뜨리거나 학교 담을 넘어 온천장과 교대를 지나고 마침내 남포동의 부산 시민들과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부교회’와 옛 ‘양서협동조합’ 자리가 있는 중고서적 골목을 둘러보고 나서 남포동의 부영극장을 찾은 필자는 더욱 쓸쓸한 감회에 젖는다. 위치를 아는 젊은이는 없고, 간신히 마흔을 훨씬 넘겼을 아저씨만이 공사중인 건물 한켠을 가리킨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산극장’ 옆쪽 건물인데, 두 건물은 모두 공사중이다. 이제 막 3층을 올리고 있는 큰길가의 건물이 옛날에 부영극장이었단다. 지금 그 곳은 ‘부마민주항쟁의 시위 장소’라면 찾기 어렵고 ‘피프광장’(PIFF ; 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이라고 물어야 쉽게 찾을 수 있다.


 

<사진021> 인파와 최루가스로 뒤덮인 부영극장 부근. 현재 PIFF 거리.


 

필자가 그곳을 찾았을 때도 마침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이곳에 혹시 부마민주항쟁과 관련된 흔적이 남은 게 없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학생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각종 홍보물과 기념품을 받기 위해 150m나 늘어선 줄 뒤에 달려가서 선다. 그 늘어선 줄의 바닥에는 PIFF광장 조성을 기념해 97년에 박은 동판과 배우․감독들의 ‘핸드프린팅’이 즐비하게 깔려 있다. 학생들은 국제영화제를 즐기고, 네온사인에 묻힌 주변의 상인들은 대목을 만났으니 또한 즐거운 표정이다. 부마민주항쟁의 자취들은 모두 역사 속에 묻히거나 전시실의 사진 속으로만 숨어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