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서`

 

글 한종수 작가 (wiking@hamail.net)

 

KTX가 출발하는 서울역과 용산역 사이에 남영역이 있다. 완공된 지 40년 가까이 되었고 이렇다 할 개축공사도 없었기에 화려한 두 역 사이에서 더욱 초라하게 보이지만 그만큼 서민적으로 느껴지는 역이기도 하다. 남영(南營)이란 지명은 이곳에 조선시대에 남쪽에 있는 진영 즉 군부대가 있었기에 붙여졌다고 한다. 용산, 남영 일대는 한강이 가까워 이동에 유리하고, 남대문 바로 밑이라 도성 안에 변란이 날 경우 바로 출동할 수는 곳이기에 군부대가 주둔했던 것이다. 그러나 구한말 국력이 약해지면서 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차지했고, 이후 일본과 미국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3세기에 걸쳐 130년 이상 외국 군대가 수도의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대공분실을 가기 위해 남영역에서 내리면서 87년 6월 10일, 바로 이 자리에 있었던 투쟁 기록이 떠올랐다. 그 날 오후 4시 45분, 경희대생과 외국어대생 600여명이 이문역에서 지나가던 전동열차를 강제로 세워 탑승했다. 열차를 세운 주인공은 다음 해 외국어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는 함칠성 군 이었다. 열차는 서울역을 그냥 지나 남영역에 정차했고 학생들은 철도의 자갈을 집어들고 대로로 나가 격렬한 시위를 시작했다. 이미 오후 1시에 을지로에서 시위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남영역에서의 시위가 그 날의 거대한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셈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남영역 바로 옆에는 6월 항쟁의 시작이었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진 남영동 옛 대공분실이 있다. 이 건물은 이곳에서 처절하게 고문당한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이 작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나면서, 또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이 보름 후인 1월 14일에 이 건물 앞에서 열리면서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가 대 간첩 수사를 명분으로 지은 건물인데, 설계를 맡았던 인물은 놀랍게도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던 김수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공간’ 사옥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에 검은 벽돌을 사용했다. 창문 디자인도 공간 사옥과 비슷해 두 건물은 형제처럼 닮아있다. 김수근은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동안 많은 국가적 건축 프로젝트를 맡았다. 자유센터와 타워호텔, 세운상가, 아르코 미술관, 올림픽 주 경기장과 체육관등 쟁쟁한 건물들이 그의 대표작이다. 경동교회와 불광동 성당 등 종교 건축도 설계했던 그는 인권유린을 위한 건물의 설계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가장 큰 특징은 조사실을 지하에 두지 않고 꼭대기인 5층에다 두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두 층을 더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인 7층이 되었다. 승강기가 있기는 하지만 5층에 올라가려면 뒷문으로 돌아가 나선형 쇠계단을 이용해야 ‘제맛’이 난다. 고문 피해자들은 손이 결박된 채 눈이 가리워져 1층에서 5층으로 바로 올라가는 이 계단을 통해 공간감각을 상실한 상태로 끌려갔다. 공포감을 주기 위함이기도 하고 아래층에 드나드는 인물들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5층은 4평으로 된 같은 면적과 구조의 조사실, 정확히 말하면 고문실로 가득 차 있다. 고문실 안에는 책상과 의자, 침대, 욕조, 변기가 설치되어 있고 자해 방지를 위해 전부 고정되어 있다. 각 방의 창문은 사진에서 보듯이 폭이 좁고 길어서 투신이 불가능하고 바깥의 빛을 차단하는 동시에 비명소리가 새어나기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 심지어 천정에 달려있는 형광등까지 쇠그물에 덮여있을 정도다. 물론 CCTV 역시 설치되어 있어 감시대상이 용변을 보는 것까지도 감시가 가능하다. 



 

아쉬운 점은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509호실을 제외한 나머지 방들은 모두 원형을 잃었다는 사실인데, 최소한 김근태 전의장이 고문을 받았던 515호실이라도 복원을 해야 할 것이다. 한 층을 내려가면 박종철 열사의 기념관으로 이곳에는 열사의 사진과 유품, 그리고 당시 신문기사가 전시되어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가보는 것이 최선이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일반 관공서처럼 주말에는 문을 닫는다. 되도록 사람들이 오지 못하도록 한 경찰의 ‘꼼수’라고 여겨지건 나만의 편견일까?



바로 옆에 지나가는 국철을 타고 있는 일반인들은 이 건물 안에서 고문이라는 너무나 비일상적이고 잔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공분실 바로 옆에 있는 롯데 소유의 건물이 롯데 그룹이 처음 한국에 진출했을 때 본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높은 담장과 두꺼운 철문이 가려주긴 하지만 번화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일반인이 접근하기 쉬운 장소에 이런 시설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경찰 같은 권력기관의 자세가 얼마나 오만했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것 아닐까?


김근태 전의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근안이라는 고문기술자의 이름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 자보다 그의 도피기간 동안 자금을 제공하고 일제고문경관의 계보를 이어받은 박처원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박처원 당시 치안감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에 앞장서 구속되었는데, 이후에도 고문경관들의 대부 노릇을 하며 뒷돈을 대주기도 했다. 그의 조작으로 학림사건, 부림사건, 한울회와 아람회 사건, 금강회 사건, 오송회 사건 등이 일어났고 수많은 피해자가 양산되었다. 얼마 전 개인적인 모임에서 김근태 전 의장님의 죽음이 화제에 올랐는데, 간호사인 지인이 십년 쯤 전 박처원이 당뇨 때문에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두 명의 수행원 겸 경호원을 거느리고 특실에 입원했는데,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지냈으며 의사나 간호사가 와도 옷을 입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당뇨라는 병은 치료보다도 본인이 세심하게 관리해야 함은 상식이다. 그런데 그는 의사와 간호사가 주의사항을 이야기 하고 나면 태연히 수행원을 향해 턱 짓을 하며 “잘 알아들었지!”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은퇴하고 늙은 다음에도 이 정도였으니 당시의 위세는 어떠했을까! 저절로 한 숨이 나왔다.   




지난 1월 14일 박 열사 25주기 행사에 귀한 손님이 두 분이 참석했다. 한 분은 고문치사사건 축소 은폐 음모를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알리고 필기도구를 제공한 안유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고 다른 한 분은 이부영 전 의장의 메모를 외부에 전달한 한재동 당시 교도관이었다. 두 분의 용기로 인해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6월 항쟁이 일어났으며 미흡하나마 박처원이 응징을 받게 된 것이다. 세상이 평범한 이들의 작은 용기로 바뀔 수 있다는 좋은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 때 두 분의 증언을 들으면서 문득 곧 헐려버릴 영등포 교도소가 생각났다. 6월 항쟁의 조역을 맡았고 백기완 선생과 김지하 시인을 비롯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갇히기도 했던 그 곳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들의 망각과 게으름이 현대사의 유적 하나를 잃게 만든 것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 한강로로 나왔는데 갑자기 3년 전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매운 노란 인파가 노 대통령님을 보낼 수 없어 이곳까지 따라왔고 할 수 없이 상주 건호 씨가 차에서 내려 인파를 돌려보낸 그 장면이 생각났다. 

초대형 역사(驛舍)를 가진 서울역과 용산역에 가려있는 남영역이지만 그 주위에 이런 역사(歷史)가 펼쳐졌다는 생각이 들자 작은 역이 다르게 보였다. 언젠가는 남영역의 이름에 박종철 열사와 김근태 전 의장의 이름을 병기하여 이곳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만든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