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연휴의 마지막 날에 있었던 북한 외무성의 핵 보유 선언은 한반도와 주변국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특히 이라크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이란을 다음 표적으로 삼아 압박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돌발 선언에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분위기다. 5·18민중항쟁과 부산 미문화원 사건 |
특히 민중문화연구회 활동을 하는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의 경우에 각 개인마다 담당 형사가 정해져 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행이 붙을 정도였다.“시위 며칠 전 학교 근처 중국집에서 써클 회식을 하는데 우리는 2층에서 하고 형사들은 1층에서 했지요. 그때 형사들의 긴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 특이사항 없이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느라 신경을 많이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재웅(46, 당시 경제학과 80학번) 씨는 삼엄한 학원사찰을 따돌리면서 시위 준비를 한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은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송민석 동지가 서울 종로에서 대형 성조기를 구입해 왔고 유인물 작성은 이재영 동지와 제가 했구요. 교사이셨던 제 아버지가 사용하던 가리방(당시 학교에서 사용되던 시험지 작성 원판)을 가져다 김을용 동지의 자취방에서 이재영 동지와 프린트 작업을 밤새 했습니다.” 이날 준비된 유인물은 <강원대학교 민주화투쟁 선언문>과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동지들의 투쟁에 찬사를 보낸다>라는 8절지 2종으로 각각 1천 매 씩 만들었다. 4월 22일 오전, 일행은 춘천 시내 모 레스토랑에서 유인물 분배와 역할분담을 확인한 뒤 시간 등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헤어졌다. | |
정오가 될 무렵, 1층에 식당이 있는 학생회관으로 점심을 먹기 위해 학생들이 차츰 몰려 들었다. 학생회관 3층 구석에 위치한 써클 룸(현재 강원대 합창단 동아리방)에서 이헌수, 김래용은 출입문의 열쇠구멍에 못을 박고 캐비넷, 회의 탁자, 의자 등을 총동원해 서둘러 바리게이트를 쌓기 시작했다. 시위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경찰의 진입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곧 창문을 활짝 열고 주변을 지나가는 학생들을 향해 메가폰의 사이렌을 울리며 유인물을 뿌렸다.
이헌수와 김래용은 성명서를 낭독한 후 “양키 고 홈!”이란 구호와 함께 들고 있던 성조기에 불을 붙였고 살랑이는 봄바람에 성조기는 훨훨 잘 타올랐다. 같은 시간에 다른 이들은 도서관(현재 박물관), 사범대와 연적지(연못) 부근, 경영대, 공대, 춘천 시내 명동거리 등에서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뿌렸다.
최대한 상황을 유지하며 마지막에 집회를 조직하려던 이들의 계획은 이들의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5분여를 넘기지 못했다. 날렵한 경찰들이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온 것과 공들여 쌓아 놓은 바리게이트가 운동으로 다져진 경찰들의 완력에 허물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헌수, 김래용, 박인균은 현장에서 체포, 연행됐고 다른 이들은 사전에 약속한대로 서울 종각으로 도피했다가 논의 끝에 이틀 뒤에 자수했다.
이헌수 씨의 안내로 다시 찾은 대공분실은 여전히 춘천 시내 대로변(효자로)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높은 담과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대문 위의 철조망, 내부가 가려진 창문 등 지금 봐도 음산하고 불쾌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삼일 낮밤을 한숨도 안 자고 조사를 받았는데 그 당시는 워낙 고문을 심하게 하던 때라 우리 생각에 잠 안 재우는 건 고문 축에도 끼지 않는다고 위안을 했을 정도였죠. 잡혀가자마자 물어본 게 ‘간첩과 접촉했냐’, ‘집안에 월북한 사람 있냐’ 하는 거 였어요.”
일반 가정집인 것처럼 명패를 달아 놓았으나 대문에 쓰인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 본 결과 강원도경 보안과 소유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내부 취재는 거절당했다.
보도 통제와 탄압
강원대의 시위는 엄혹한 독재정권 시절에 부산 미문화원 사건의 의미를 확산시키고 학원 내에서 미국의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시위였다. 더욱이 성조기를 불태운 방식은 학생들의 결연한 반미의식과 함께 공개적인 언로와 의사소통이 차단된 당시의 폐쇄적인 학원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제7조 1항의 북괴 동조죄와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제3조 1항의 사회혼란죄 위반으로 기소되어 우방의 국기를 태운 죄 값으로 최고 2년 6개월에서 최하 1년의 징역형을 살았다. 2005년 2월의 강원대는 방학 중이라 한가하다. 학생회관(천지관)을 오가는 어린 학생들은 이런 사건과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비록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라크 파병, 불평등한 소파협정, 국가보안법이 유지되는 지금의 한국 현실은 그때에 비해 과연 얼마만큼이나 나아졌을까?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시위 청년들이 82년 재판정에서 했던 말을 돌이켜본다.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성조기 소각은 우리가 비폭력적으로 택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미국이 진정한 우방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송민석) ‘분단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민중과 지배집단의 괴리는 더욱 깊어지고 모든 시민들은 공포감 속에서 무력해지고 있다. 역사 앞에서 다시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질곡 속에 헤매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길을 택한 것이다.’(정재웅) ‘양키 고 홈! 은 2차 대전 후 후진국 전반에서 걸쳐 나온 구호로서 이것을 두고 북괴 동조 운운하는 것은 전두환 전기집을 읽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이재영) ‘이제는 더 이상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말 외국 보기 부끄러워 못 살겠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어 우리 국민 진짜 한번 잘살게만 해 달라.’(박인균) ‘우리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특정집단과 국가를 위해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의 조그만 행동이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우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비록 지고 있지만 우리 뒤에 오는 이들은 우리 위를 밟고 필 것이다.’(김래용)
- 1982년 7월 5일 재판기록 중에서 |
<글 최영환>
1974년 서울 출생
2004년 청계천 르뽀집 『마지막공간』 공저(삶이보이는창), 경기도 시흥
작은자리이주노동자센터에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