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유월, 붉은 옷과 태극기로 시청과 광화문을 수놓았던 응원 인파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15년 전 또 다른 유월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지향과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군중을 비교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 있으나, 어떤 이들에겐 오랜만에 접하는 광장의 폭발적인 구호와 자발적으로 단결된 군중의 모습에서 그 옛날 아름다웠던 한때가 연상됐을 법도 하다.

겨우 한 종목의 스포츠에 전국적으로 열광하는 기현상을 두고 어떻게든 87년 항쟁의 맥을 찾으려 애썼던 그들의 모습에서 억지스러움보다는 왠지 서글픔이 앞섰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인과 가족 이기주의에 빠진 나머지 광장과 공동체의 정서를 잃었다는 것이고 생계 문제에 다소 여유가 생긴 반면 시대에 대한 고민은 더욱 빈곤해졌다는 사실의 반증일 테니 말이다.

과연 우리가 속한 사회와 시대는 인류애, 자유, 평등 등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을 정도로 민주화되고 삶이 윤택해진 것일까? 현재의 모습을 87년 6월 거리 곳곳에서 온몸을 던져 싸웠던 이름 없는 수많은 민초들이 바랐던 세상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80년 봄의 학생 시위와는 달리 전국적으로 기층 민중, 시민,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서 독재정권의 항복을 받아냈고 마침내 오늘날의 시민사회를 태동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87년 6월항쟁!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싸움이었고 현재의 우리에게 전하는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위해 당시 가장 격렬했던 항쟁의 한 현장인 부산을 찾았다.

최첨단 건물로 새로 지어진 부산 역사를 빠져 나와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 동지회의 총무 남기수 씨를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바라본 중앙로 거리의 풍경은 화사한 햇살을 받아 매우 한가롭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더욱이 차창으로 들어오는 살짝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은 한없이 부드러워 18년 전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던 민중의 분노와 절규의 흔적을 눈치 채기는 쉽지 않았다.
부산에서 출판사를 운영 중인 남기수 씨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사무실로 데려가 또 다른 부민협 동지회 소속인 이성원 씨를 소개시켜 주었다. 남씨는 당시 내부에서 유인물 제작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거리 상황에 대해서는 이씨가 더 잘 알 것이라는 겸손한 이유에서였다.

당시 수산대 학생으로 시위를 주동하고 부민협에서 막내로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이성원 씨는 직접 운전을 해서 부산민주공원과 항쟁의 현장 곳곳을 안내하며 87년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를 통해 부민협의 활동과 항쟁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고 또한 영원한 청년 싸움꾼 박행원 선생을 소개받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그때 참 엄청났지요. 시위대가 차도를 점거하고 지나가면 육교 위에서 아저씨, 아줌마들이 힘내라고 음료수나 돈을 던져 주는 거예요. 경찰에 쫓기다가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상인들이 숨겨주고 가게 셔터를 그냥 내려 버려요. 거기서 민중의 힘을 느낄 수 있었지요.”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던 이성원 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이씨는 유월항쟁과 이후 노동자 대투쟁에 이르는 몇 개월 동안 거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로 인해 부민협 회원 중에는 가족 간에 불화가 생기는 일도 있었으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헌신에 대한 자긍심이 더 컸다. 부민협은 사라졌지만 동지회 회원들은 여전히 시민단체활동과 지역주민운동을 통해 항쟁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가톨릭센터 농성과 서면 광장 시위
한편 명동성당 농성이 외부의 압력과 회유로 아무런 성과 없이 6일 만에 해산되자 부산에서는 다음날 그 열기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가톨릭센터 농성을 시작으로 다시 시위의 불길을 키웠고 22일까지 항쟁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농성단의 존재로 부산 전역의 시위는 더욱 가열 차졌고 그만큼 최루탄과 백골단의 폭행에 의한 부상자와 연행자도 속출했다. 특히 최루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 난사되어 많은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와 심한 경우에는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일명 사과탄이라 불리는 최루탄 4,5발은 쌀 1가마, 지랄탄이라 불리는 64연발 다탄두 최루탄 1발은 쌀 7가마와 맞먹는 가격이었으니 전두환 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민의 혈세를 남용했던 것이다.(『부산민주화운동사』, 부산민주공원, 2003)
18일에는 국민운동본부 주최의 ‘최루탄 추방의 날’ 대회가 시작됐고 서면에서만 6만이 넘는 시위대가 차도와 도로를 점거하고 즉석에서 대중 정치집회가 열렸다. 시장 상인, 영세민, 회사원, 가게 점원, 공장 노동자 등 다양한 연사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한편 사상공단의 노동자들은 잔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하자!”, “노동자 단결하여 살인정권 군부독재 끝장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서면으로 합류했다.

그 저녁 무렵,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서면 로터리로부터 부산상고 앞, 부전시장 방면, 범내골 일대까지 8차선 도로를 모조리 점거해 버렸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 군중이 불어나 서면 로터리에서 부산진시장에 이르는 5킬로미터의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자 최루탄을 쏘아대던 경찰들도 마침내 진압을 포기하고 도피하기에 바빴다.

셋째, 부산 시민들은 직접적이고 행동적이다. 시위를 구경하다가 흥분하면 대학생들보다 더욱 격렬하게 경찰을 공격한다.

부산의 싸움꾼, 박행원
항쟁 기간 내내 거리의 현장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역사의 순간을 촬영했던 사진가 박행원 씨를 만났다.

박씨는 70년대 후반부터 국제사면위원회 부산지부 활동을 시작으로 부마민주항쟁에 가담했고 5·18민중항쟁 때는 항쟁 상황을 부산에 알리다가 구속된 적도 있으며 유월항쟁 때는 부민협 선전 담당으로 항쟁을 이끌었다. 그는 현재 바다가 보이는 해운대의 한 빌라에서 글 작업과 필름 정리를 하면서 병든 몸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유월항쟁을 단지 6월에 크게 데모한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틀린 겁니다. 그 배경을 제대로 보자면 전두환 등장부터 봐야 하고 그것을 얘기하자면 박정희, 이승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자면 일제의 침략과 동학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결국 우리 모순의 본질까지 가야 합니다.”

30년 투쟁의 삶을 통해 얻은 몸과 마음의 병으로 아직 유월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정리해볼 시간이 없었다는 박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을 이어갔다.
“항쟁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긴박성의 연속이었어요. 모든 하루가 소홀하지 않고 이쁜 날들이었어요. 환희심으로 가슴 안 졸인 날이 없었고……. 유월항쟁의 의미는 인간이 다시 직립했다는 거예요. 형상만 인간이었지 소수의 쓰레기 같은 집단들에 의해 우리가 짐승 취급당했잖아요? 부마항쟁 때나 광주 때도 직립을 하려 했으나 계엄군들 군홧발이 하도 세서 꺾여버린 것이죠. 그러나 유월항쟁 때만큼은 우리가 제대로 싸웠고 직립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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