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한 씨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디를 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고추투쟁 때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늘 농협중앙회 아니면 야당 당사로 몰려갔어요. 근데 우리는 청와대로는 못 갈망정 여당 정도는 들쑤셔놔야 뭐가 되도 된다고 본 거란 말이죠.”
그리하여 당시 집권여당인 민정당 중앙당사를 장악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사전답사를 통해 민정당사까지 가는 도로 상황과 경비 상황, 당사 내부구조까지 알아내는 등 치밀한 준비를 했다. 공무원들에게는 택시노조와 직거래를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안심을 시켜 놓고 화물차 12대에 고추 5만 근을 싣고, 전세 버스를 탄 사람까지 모두 60명이 흩어져서 서울로 향했다.
밤 12시, 12대의 화물차가 지금은 여주휴게소로 바뀐 가남휴게소에 집결했다. 민정당사 경비들이 가장 나태해지는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맞추어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서울에 가 있던 이상식 씨는 한겨레신문사를 찾아가 권오상 기자와 함께 취재차를 타고 다니면서 계속 상황을 점검하고 취재용 카폰을 이용해 화물차 대열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가남휴게소에서 장작불에 몸을 녹이며 대기하고 있던 1호차가 휴게소를 출발했다. 그 뒤를 2호차, 3호차, 4호차가 차례대로 따라붙었다. 12대의 트럭이 일렬로 서서 관훈동 민정당사까지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봉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고추 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이다. 고춧값 폭락은 고추가 농가소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봉화 농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었다.

당사 앞 일방통행 도로에 고추자루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11대분의 자루가 다 부려지고 난 후, 성능이 시원찮아 뒤늦게 도착한 12호차가 그때서야 부랴부랴 달려온 전경들에게 가로막혔다. 몸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틈을 타 12호차 위로 올라간 이상식 씨가 포장을 찢고 자루를 부리기 시작했다. 60킬로그램이 넘는 자루가 굴러 떨어지자 전경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기 바빴다.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그때 권오상 기자의 연락을 받은 종로서 출입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달려왔다. 그렇게 해서 고추 생산비 보장 투쟁은 전국에 알려지면서 탄력을 받게 되었다.
민정당사 앞은 5만 근의 고추자루로 길이 막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전량 수매라는 농민들의 요구안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버티는 일이었다. 전경들은 막힌 길을 뚫기 위해 당사 앞 공터에 고추자루를 쌓기 시작했고, 농민들도 합세해 자루더미 안쪽에 공간을 두어 벙커를 지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12월이었다. 농민들은 화물차에 함께 싣고 간 장작과 시민들이 가져다 준 연탄과 폐가구를 때면서 민정당 의원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농성을 했다.
당시 민정당사뿐만 아니라 농협중앙회와 김대중 씨 집 앞에도 몇 십만 근의 고추가 부려져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은 고추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정부는 전국에서 20만 톤을 수매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전량 수매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고추 투쟁은 봉화의 효과적이고 치밀한 작전으로 일정 부분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20만 톤 수매는 미봉책일 뿐이었으니, 이듬해 2월 13일 여의도에 2만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수세폐지 및 고추 전량 수매 쟁취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하려다 경찰에 제지당한 농민들은 돌과 화염병으로 맞서고 차량을 불태우는 등 수십 년 쌓인 분노를 폭발시켰다. 노태우 정권은 이날의 농민투쟁을 폭력난동으로 매도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벌였다.
 

왼쪽부터 권영물, 이상식 이경한 씨가 인터뷰 중 20년 전 당시의 자료사진을 보며 기억을 추스르고 있다.
 

계속되는 싸움, 그러나…….

이후 생산비 보장 투쟁은 1990년대까지 계속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이농이 가속화되었다. 젊은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가고 없으니 농민회 활동도 예전 같을 수가 없다. 또 당시에는 한 농가의 경지면적이 3천 평만 되어도 생활이 유지되었지만 농산물 가치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지금은 평균 1만 5천 평을 붙여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앞뒤 돌아볼 여력 없이 농사일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여전히 농민회 활동을 하며 굵직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상경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싸움은 늘 밀렸고 농민들은 지쳤다. “지금 현실에 울화통이 터지지만, 쉰을 넘긴 나이다 보니 가정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도 마음만은 늘 현장에서 함께하고 싶어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이경식 씨의 말은 오래 전부터 고령화 사회가 되어버린 농촌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자 고추밭에서 일하던 한 노인이 일을 멈추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농가에서 재배하는 모든 작물이 농민들의 목숨줄이나 마찬가지였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 작물을 지키려했지만 이제 농민들은 그것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이상식 씨는 대안은 생명운동밖에 없다고 말한다. 생명계의 깨진 균형을 회복하는 일만이 초국적 자본의 전 세계 장악과 곧 닥칠 식량 안보 위기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전한다. 그의 또 하나의 소망은 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여태까지 내 자식만큼은 농부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어요. 그러나 농축산물의 가치가 계속 떨어질 게 뻔한데, 지금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갈등이 커지고 있습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상이 시작될 무렵, 청와대로 찾아간 전농 의장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농촌은 망하는데, 한미 FTA가 타결되든 안 되든 무슨 상관이냐?”와 비슷한 말이었을 게다. 8월의 들녘 가득 넘실거리고 있는 곡식들은 더 이상 풍요와 안식의 상징이 아니다. 종자회사가 모두 외국자본에게 넘어가 유전자 조작 종자가 전국의 들녘에 뿌려지고 있으니, 우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먹을거리는 과연 얼마나 남아 있는가.
 
글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6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다.

사진 황석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