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5월 2일,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한밤중이었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의 한 야산지대에 트럭 몇 대가 멈춰 섰다. 서울시 청소용 차량인 이 트럭들은 뒤에 실린 물건들을 한 곳에 황급히 부려 놓고는 매연을 내뿜으며 사라졌다. 처음에 그것은 거대한 쓰레기더미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곧 검은 유령처럼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름에 가린달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자 그것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것은 수십 명의 어른과 아이, 가재도구와 이불보따리, 식기와 곡식자루가 뒤섞인 그들의 남루한 세간이었다. 주변의 사물이 눈에 들어오면서 그들은 이곳이‘일자리 걱정 없는 신천지(新天地)’가 아니라 난방은커녕 전기와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집단수용소라는 걸 깨 달았다. 아무렇게나 깎아놓은 울퉁불퉁한 노면에는 햇볕을 간신히 가릴 만한 대형 천막 몇 개가 설치돼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천막 주변을 서성이던 어른들은 한기에 잠이 깬 아이들이 울어대자 서둘러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황무지에서 새 삶을 개간해야 할 운명에 놓인 이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유형의 길을 떠난 수인(囚人)도 전쟁과 천재지변을 당한 피난민도 나환자들도 아니었다. 서울 청계천변 무허가 판잣집에서 강제 철거당한 빈민들이었다.‘ 인간의 땅’에서 추방된 이들 앞에는‘짐승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여가 흐른 1971년 8월 10일, 궂은비 내리는 경기도 성남출장소 뒷산에 수만명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삽과 곡괭이를 쥔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배가 고파 못살겠다.”
관공서가 불타고 경찰 지프가 하천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사람들은 그것을‘천민들의 폭동’이라 했다. 관제 언론은 이 분노의 시간을‘빗속의 난동 6시간’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난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몸부림, 허허벌판에 쓰레기처럼 버려진‘무허가 인생’들의 인간 선언이었다


 
‘개발’이란 이름의 테러리즘
 
산이에요. 지금은 다 택지로 개발됐지만 전에는 한동안 예비군 훈련장으로도 쓰이기도 했던 곳이죠. 8?10사건 후 성남출장소가 계속 확대?개편되다가 1973년 시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성남시청이 세워졌습니다.” 지금, 분노의 표적이었던 성남출 장소 건물은 간데없고 야트막한 야산 너머로 아파트 단지들만 무심히서 있을 뿐이다. 청사를 등지고 대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성남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도심의 풍경은 서울 주변의 여느 위성 도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대로, 그 좌우에 사열하듯 늘어선 고층 빌딩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했던가. 인구 100만을 거느린 거대 도시 성남 어느 곳에서도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그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상전벽해’란 말을 가장 잘 실감 할 수 있는 곳이 성남이에요.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모든 게 변했거든요. 하여간 남아 있는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남한산성과 영장산을 두 축으로 하여 참나무?상수리나무?오리나무들이 무성하게 군락을 이룬 산간 벽지였다. 주민들은 구릉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계단식 논을 부치거나, 숯을 구워 인근 송파장에 내다팔았다. 그러던 1969 년 3월 4일, 지금의 중앙시장 건너 산등성이에 수십 대의 불도저가 나타나고 캐터필러 굉음이 지축을 흔들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평화도 깨졌다.
박정희 정권은 하천변에 거미줄처럼 퍼진 빈민굴이‘산업입국’,‘ 수출입국’에 빛나는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이 골치 아픈‘무허가 삶’들을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치워버리겠다는’야심찬 프로젝트를 세웠다. 외국 손님들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안보의 사각계층인 빈민들의 관리와 통제가 용이한 곳으로 선택된 곳이 바로 경기도 광주 3백 50만 평 부지였다. 서울시는 이곳에 인구 50만 이상의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면서 택지 정지작업도 마무리되지 않고 수용시설도 변변치 않은 상태에서 철거민들을 이주 시켰다. 신도시 건설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선입주 후건설’이었다.
“성남은 동에서 서쪽으로 구릉이 셋이 있어요. 이 구릉의 껍질만 벗겨가지고 줄긋고‘이게 택지다.’한 거예요. 껍질만 벗겼다는 건 당시 택지 개발을 맡았던 초석건설에서 나온 말이에요. 껍질 벗길 돈밖에 안 받았는데 도로를 더 낮게 한다든가 땅을 더 판다는 건 상상 할수없다는거죠.”
빈민에 대한 국가 관리통제정책은 박정희 정권 때가 처음은 아니다. 1934년 경성부의 조선시가지계획령은 세민지구라 하여 경성의 하천변이나 임야를 무단 점거한 토막민(土莫民)을 도시 내부에 분산 수용할 계획을 담고 있다. 이는 토막민 주거지를 일반 주거지와 분리하려 했다는 점에서 배제 정책이지만 추방과 외곽에서의 집단 수용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정권의 야만적인 빈민 정책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데가 있었다.
경영행정이라는 미명하에 헐값에 매입한 땅을 고가로 되팔아 막대한 차익을 챙기면서도 이주민들이 처한 고통에 대해서는 눈감았던 박정희 정권의 신도시 프로젝트는 개발이라는 이름의 테러리즘에 다름 아니었다. 오죽하면, 성남시에서 펴낸『성남시사』조차도 성남의 건설 과정을 세계 어느 나라에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실패작 신도시 건설’이라고 백하고 있을까.

 
죽음을 부르는‘빈곤의 현장’
어느 새 길은 수정로로 이어졌다. 이 길은 복개되기 전까지 탄천의 지류인 독정천이 흐르던 곳으로 8?10 사건 당시 성난 주민들이 경찰 지프차를 밀어서 떨어뜨렸던 역사의 현장이다. 가수용 시설에 수용된 이주민들에게 탄천은 생명의 젖줄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식수를 길어다 먹고 빨래도 하고 심지어 용변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공동변소와 펌프가 30가구에 하나 꼴이었으니 위생 상태가 엉망이었죠. 급하면 개천가에 용변을 보고 또 그 물을 식수로 길러 먹고…….

 
 
천막 하나에 여섯 가구, 여덟 가구가 한꺼번에 들어가서 캐비넷 같은 걸로 파티션을 하고 살았으니, 그 삶이라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처참한 것이었어요. 1970년 봄에는 전염병까지 돌아서 완전히 아수라장인데도 철로변이나 하천변 철거민을 태운 트럭은 꾸역꾸역 한강을 넘어오는 겁니다. 지옥이 따로 없죠. 두 시간마다 다니는 버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움직일 수가 없어요. 내릴 때 창문으로 기어나가거나 뛰어내리다 보니 온전한 유리창이 하나도 없죠. 그 북새통에 아이가 깔려죽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어요. 일자리도 없죠. 서울에서 날품팔이를 하던 사람들이 이 허허벌판에서 뭘 하겠어요? 굶고 술 먹고 싸우는 일밖에는 할 게 없었던 거죠. 성남 초기의 삼다(三多)가 뭔지 아세요? 술집, 교회, 여관이에요.”
또 하나, 많은 것이 있었다. 복덕방. 1969년 가을부터 전국의 부동산 투기꾼들이 몰려들어 분양증 전매행위가 극에 달했다. 경기는 과열되고 전입자가 폭증했다. 1971년 8?10 사건 직후 서울시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광주대단지 인구 12만 명 중 전입자 수는 철거민의 1.6배에 달했다. 더욱이 1971년 4월과 5월의 선거는 많은 공약을 남발했고 그것은 빈민들을 대단지로 유혹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서울시가 분양 토지 전매행위를 제한하면서 개발붐도 사그라들었다.
업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단지에 남은 것은 혹독한 굶주림이었다. 주민의 80%가 실업자였고 서울에 나가 날품을 팔려고 해도 버스비 35원이 없어서 주저앉는 사람이 많았다.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산모가 먹을 게 없어서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 정도로 그 당시 생활상은 비참했다. 우리는 그 비극적인‘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신흥동 팔각정 터로 향했다. 팔각정이 있던 자리엔 지금 복지회관이 들어섰지만, 이곳은 당시 주민들의 유일한 쉼터이자 놀이 공간, 정보 교류의 장이었다고 한다.


 
“이 팔각정은 대단히 중요한 장소였어요. 단지 내에 문화 공간이라 할 만한 시설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극장이나 다방이 있다 해도 돈 들고 또 그 형편에 차를 마신다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구릉 꼭대기에 정자를 지은 거 같아요. 초기 가수용 시설이 다 이쪽에 있었으니까……. 그땐 주변에 집이 없어서 팔각정이 아주 도드라져서 단지 사람들이 위치를 파악하는 유용한 공간이었어요. 산모 관련 소문이 있었던 집도 바로 이 옆이었고요. 그 진위 여부
와상관없이당시최극빈층이모여살았던‘빈곤의현장성’을가진공간이라고봅니다.” 하동근 씨가 이끄는 대로 연립주택들이 성냥갑처럼 늘어선 비탈길을 타고 내려갔다.

 
경사가 어찌나 가파른지 맨 꼭대기까지 오르면 정말‘달’에 닿을 것만 같은 달동네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아간 곳은 분당선 태평역 근처에 있는 성남교회. 1970년 11월부터 광주대단지 제일교회라는 이름으로 주민들과 고락을 같이 했던 곳이다. “1973년 성남에 들어온 주민교회와 방식은 다르지만 이 교회 전성천 목사도 나름대로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해 신경을 많이 썼죠. 단지에서 사람이 죽으면 이 양반이 다 알아서 장례를 치러줬는데 그 소문이 퍼져서 사람이 죽기만 하면 교회 앞에 시체를 두고 가는 거예 요. 많을 때는 20구를 처리하기도 했대요. 교통경찰 했던 분한테 들은 얘긴데, 당시 주 업무가 시체 치우는 일이었다는 거예요. 그만큼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갔던 거죠.”

 
불타는 광주대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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