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한 차례 지나간 뒤 날은 더 무더워졌다. 지하철 1호선 신이문 전철역사를 무심히 빠져나오던 나는 숨 막히는 지열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어지러웠다. 비에 씻긴 태양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고, 폭염에 달궈진 아스팔트는 무엇이든 걸리기만 하면 통째로 녹여 버리겠다는 듯이 지글거렸다.
층계참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문초등학교를 지나 이문삼거리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만난 동네 풍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 서울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언덕길 양켠에 촘촘히 들어선 낡은 주택과 점포, 술집들, 그것들 사이로 미로처럼 이어주는 비좁은 골목과 계단에는 오랜 세월의 더께가 앉아 있었다.
의릉·한국예술종합학교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가노라니 소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로 단장한 능 입구가 나타났다. 훤하게 트인 능 입구는 저 복닥거리는 산 아래 동네와는 격이 다르다는 듯 진한 솔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정치의 무덤, 의릉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산 1-5번지. 수려한 천장산 자락에 자리한 의릉은 조선 20대 임금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다.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로 태어난 경종은 당쟁의 와중에서 어미를 잃었고, 즉위 4년 만에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37세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엄연히 1970년에 조선왕조 사적 제 24호로 지정된 왕릉이지만, 일반인들에게 의릉이란 이름은 아직 낯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천장산 정상에 레이더가 설치돼 있고, 주변에 군부대가 주둔해 있던 출입통제구역이었다.
의릉의 수난은 1962년 중앙정보부가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제일 먼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하였다.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라 읍·면제가 폐지되었고, 농협이나 농지개량 조합의 조합장 선거 등 민주적·자치적 성격을 띠는 모든 제도가 폐지되었다. 바야흐로 정치는 죽고, 정보와 공작이 판치는 기괴한 세상이 열린 것이다.
정치의 죽음을 발판으로 한 중앙정보부의 탄생은 낭비와 비효율을 극도로 혐오하는 군인 체질에 딱 맞는 것이었다. 군인들에게 정치는 낭비요, 민주주의는 비효율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몇 군데 후보지를 놓고 고심하던 끝에 최종적으로 의릉을 낙점했다고 한다. 왕릉 중에서 중앙정보부 청사 자리를 고르라고 조언한 이가 박정희라는 설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둘 중 누구 아이디어였든 간에, 수십 년동안 이 나라를 쥐락펴락할 정치공작 센터로 왕릉을 선택한 것은‘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는 정보장교 출신들다운 절묘한 발상이었다.
왕릉 부지를 꿰찬 중앙정보부는 1995년 국가정보원이 내곡동 신청사로 이전하기까지 30여 년 동안‘정부 위의 비밀 정부’로 군림하며, 의릉 경역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훼손했다. 마구잡이로 건물을 지었으며, 인공 연못과 일본식 정원, 잔디구장을 조성했다.

 
의릉 밑에는 양지못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인공 연못이 있었다. 왕릉 아래 못을 팠다고 해서 이 씨 종친으로부터 많은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양지못에는 서슬 퍼런 시절에 생겨난, 코미디 같은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왔는데‘정보기관이 한창 잘 나갔던 중정 시절에는 양지못 붕어아비(금붕어를 관리하는 직원)가 고향에 내려가면 군수가 직접 영접을 나왔다.’고 한다.(김기삼,『 나의 국정원 체험기』,「 주간 일요서울」

 
김기삼에 의하면, 깜깜한‘정치의 무덤’에 누워 모진 세월을 견뎠을 가여운 왕 경종이나, ‘권력의 일들’에서 소외된 채 허리에 철조망을 두른 천장산을‘중앙정보부산’이라 부르며 경원했던 국민들이나 당시‘양지못 붕어아비’만도 못한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1972년 남산 중앙정보부 분청이‘고문의 새 강자’로 등장하기전까지 이곳은‘여자를 남자로,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빼고 모든 게 다 가능하다는 바로 그 곳이었다. 이 쓰라린 역사의 현장이 정확한 과거사 규명도 없이역사의 바깥으로 사라진다니 착
잡한 마음 금할 수가 없었다.
“위령제는 지낸대요?”
“그럼! 못해도 여기서 수십은 죽어나갔을 텐데……. 모르긴 몰라도 여기 지하실은 사진으로 찍
어 둘 만할 거요.”
그러나 지하는 이미 전원이 완전히 내려진 상태였고, 공사장 감독은 후래시라도 켜고 내려가게 해달라는 우리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0년 전부터 영화과 학생들의 편집실로 사용해온 지하실 출입의 철거를 앞두고 새삼스럽게 통제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긴 복도를 따라 두평 크기의 골방이 쭉 이어져 있다는 학생들의 증언에 기대어 지 하 공간의 모습을 상상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고문수사의 망령 탓인지, 한국예술종합학교에는 유난히 괴담이 많다. 양지못 준설을 위해 바닥의 흙을 파내자 시체 3구가 나왔다는 둥, 새벽 3시면 방마다 노크소리가 들린다는 둥, 수직상승하는 귀신들이 있다는 둥…….
진실이 파묻힌 곳에 괴담이 돌기 마련이다. 실제로 1960년대 양산한 많은 간첩단 사건의 연루자들이 이 석관동 청사에서 고문수사를 당했다. 천상병(시인)·윤이상(작곡가)·이응로(화가) 같은 예술가들이 간첩사건에 휘말려 이곳에서 치도곤을 당한 대표적인 인사들이지만, 당시 이곳에 끌려온 사람 중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간첩’,‘ 북한’이라면 벌벌 떠는 세상에서 고문수사에 의해‘간첩’으로 조작된 그들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 평생을 견고한 침묵 속에 살아온 그들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인터뷰이 한 명 없이 이 쓸쓸한 역사의 현장을 답사해야하는가장큰이유다.
동백림 사건 이후 독일에서 소아과 전문의로 살아온 이수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옥 같은 고문의 기억을 상세히 털어놨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전기고문이다. 전기선을 양손 새끼손가락에 각각 감는다. 한 사람은 물을 먹이고 다른 한 사람이 야전용 전화기 손잡이를 돌려 전기를 일으킨다. 손잡이를 빙빙 돌릴 때마다 전기가 팍팍 꽂힌다. 악랄하게 할 때는 한 쪽 선은 손가락에 그리고 다른 한 쪽 선은 생식기에 접속하고 전기를 넣는 것이다. 그러면 대개 정신이 나가고 기절해 버린다.
보통 의자에 앉혀놓고 전기고문을 하는데 전기가 몸에 들어오면 그 충격 때문에 누구나 다리가 부들부들 떨게 되어있다. 그 당시 나는 왼쪽 다리가 마비상태여서 떨지 않았다. 고문하는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다리가 떨릴 때까지 전기의 강도를 높였다. 정신을 잃고 나중에 깨어나서 사정을 얘기하니까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서 오른쪽 다리도 마저 마비시켜 놓겠다고 겁을 주며 원하는 대답을 유도했다.”

 


‘양지’는 없다
 
1972년 남산 분청이 세워지면서 석관동 본청과 남산 분청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남산은 주로 국내 분야를 담당했고, 석관동은 해외 분야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석관동 본청은 국내외 전 분야에 걸쳐 끼어들지 않는 데가 거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이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병충해에 강한 다수확 품종 개발에 혈안이 돼있던 1964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요원들을 시켜 이집트에서 볍씨를 훔쳐왔다.
1966년 북한이 잉글랜드월드컵 8강에 진출하자 중앙정보부는‘우리는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을 딴‘양지축구단’을 창단했다. 양지팀 선수들은 군 복무를 대신하면서도 실업팀 수준의 월급을 받는 등 특급대우를 받았고, 석관동 중앙정보부 내 잔디구장에서 맹훈련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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