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일상, 하루하루의 고민 속에서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만큼의 자유라도 누릴 수 있는 것은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 운동 덕분입니다. 



우리나라는 1945년에 해방을 맞았지만, 곧이어 국토 분단과 6·25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후 민주주의의 실현, 평화 통일, 친일파 척결의 과제가 남았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이러한 민족의 과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을 고치고 온갖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1960년,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분노가 4·19 혁명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4·19 혁명에서는 무엇보다 학생들의 참여가 눈에 띄었습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고등학교 학생들은 일요일인데도 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야당의 선거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정부에서 등교를 지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거리로 나가 ‘자유’와 ‘학생들의 인권 보장’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3월 15일 노골적인 부정 선거가 치러진 후, 전국에서 시위가 들끓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희생 끝에 이승만이 물러났습니다. 4·19 혁명은 우리 국민들이 처음으로 정권을 무너뜨린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 후 20년 가까이 독재가 이어졌습니다. 박정희는 1972년에 10월 유신을 일으켜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철저히 억압했습니다. 이러한 독재 권력은 급속도로 추진된 경제 발전의 성과와 언론 통제 뒤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1979년에 박정희가 피살되면서 유신 체제는 무너졌습니다. 국민들은 이제 숨 막히는 독재가 끝나고 자유가 찾아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군인들이 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에 반발해 1980년 5월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전두환은 비상 계엄령을 선포해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민주인사들을 잡아갔습니다. 특히 광주에서는 공수 부대가 투입되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군인들의 총에 쓰러지자, 광주 시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언론을 통제하면서 이 사건의 진실을 철저히 숨겼습니다. 9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이 사건은 5·18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인정되었습니다. 



기나긴 독재의 세월 속에서 국민들의 자유가 억압되고 민주주의가 실종되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은 6월 민주 항쟁으로 다시 크게 꽃을 피웠습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면서 6월 10일,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민주화 운동은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도, 순탄하지도 않습니다.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달성되었다고 해서 그 수준이 그냥 지켜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국의 작가 루쉰은 희망을 길에 비유하면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길이 된다고 했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길도 그렇습니다. 원래는 없던 길을 손 맞잡고 함께 싸운 사람들이 만들어냈습니다. 그 길을 우리가 이어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