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YMCA

종로 기독교회관․YMCA회관 :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상징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교회 

○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 운동은 60년대 시기의 그것과 비교하여 주체들이 보다 확장되고 결속되어진 `연대` 운동으로서 출발하였다. 즉 4.19 혁명 이후 60년대 시기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주역이었던 학생세력이 지식인, 종교세력들과 분리된 채, 단지 이슈에 따른 시위중심의 운동을 전개하였다면, 70년대 반독재민주화 운동은 이러한 운동주체들의 `고립성`을 반성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립성의 극복은 무엇보다도 63년 군정연장반대투쟁, 64-65년의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과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66년의 밀수규탄투쟁, 67년의 부정선거규탄투쟁, 68-69년의 3선개헌 반대투쟁 등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시급한 과제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60년대 중반 이후 지식인, 종교 등의 세력이 한 곳으로 결속할 수 있고, 연계할 수 있는 그리고 독재정권의 억압으로부터 민주화운동세력을 보호할 수 있는 공간적 장과 조직적 자원 및 주체역량이 일정하게 구비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종교, 특히 개신교 일부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60년대 중반 이후 사회적 참여와 실천을 표방하는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종로 YMCA


  이때 주목할 수 있는 조직이 `학생YMCA연맹`과 `한국기독학생운동연맹`이다. `학생YMCA연맹`은 일제 시기 때부터 학생과 주로 교수들로 있던 개신교의 지식인 그룹이 서로 제휴해 있으면서 해방 후 지식인 연대의 시초를 이루었던 조직이었다. 특히 `한국기독학생운동연맹`은 해방 후 기독교 세력의 확장과 더불어, 60년대 중반 이후 교회학생운동을 전개하는 골격을 형성하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조직이었다. 이 `학생YMCA연맹` 중 `대학YMCA연맹`과 `한국기독학생운동연맹`은 사회적 참여와 역사참여의식의 고양을 강조하는 이른바 에큐메니컬 노선에 입각한 조직이었다. 이 두 조직은 69년 통합하면서 `대학YMCA연맹`이 68년에 조직한 `한국학생사회개발단`을 통해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산업선교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이 시기 이들 조직에서 강사와 간사 역량으로 활동하였던 이들로는 강원룡, 서남동, 김용옥, 현영학, 김찬국(이상 강사), 강문규(간사) 등이 있었는 바, 이들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신학을 소개하면서, 70년대 기독교 반독재민주화 운동, 나아가 70년대 전체 반독재민중운동의 주요 담론이었던 `민중론`의 이념적 기초와 자원을 공급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80년대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거쳐 90년대 이후 주로 시민운동진영에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교회조직들이 촉매제가 되어 유신 치하에서 교계의 지도자들과 여러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연대하면서 7,80년대 재야운동체의 모태가 되는 `민주회복국민회의` 등이 결성되는 등, 개신교 세력은 69년 3선개헌반대투쟁 이후를 기점으로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조직적인 지지자로, 그리고 그 주체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70년대 반독재민주화 투쟁과정에서 헌법상으로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방패삼아 교회 밖의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걸쳐 조직적 망으로 포진되어 있는 개신교 세력을 정치경제적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인권`이라는 고리를 갖고 독재정권을 한국 외부에서 `미약하나마` 압박할 수 있었다. 즉 이 시기 국제적 연대망을 구축하고 있었던 세력은 이들 종교세력이 유일했던 것이다.


종로 YMCA


대표적인 성명서 낭독장

 

○ 이러한 7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교회세력이 갖는 위상과 기능성으로부터 종로 기독교회관과 YMCA는 민주화운동이 운동주체들 간의 연대와 결속을, 그리고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적 실천이 조직되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이들 공간이 70년대 반독재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서 자리잡게 된 것은 3선개헌의 후유증에서 깨어나 다시금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추스리기 시작한 70년대가 시작되어지는 첫 해부터였다. 즉 70년 4월 8일 종로 YMCA회관 8층 회의실에서 천관우 동아일보 이사, 이병린 변호사, 김재준 목사 등 각계를 망라한 저명인사들이 모임을 갖고 71년 4.27 대통령 선거와 5.25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공명을 다짐하는 <민주수호선언>을 채택하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던 것이다.


○ 또 71년 2월 YMCA 회관 2층 회의실에서는 4.19 혁명과 64년 6.3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에 참여하였던 당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민주청년협의회`가 결성되었으며, 같은 해 4월 21일에는 YMCA회관 도미토리 홀에서 `민주수호청년협의회`가 백기완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하면서 결성되었다. 73년 12월 24일에는 YMCA회관 2층 회의실에서 함석헌, 장준하, 계훈제, 백기완 등 각계의 민주인사들이 연합,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였는 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은 열흘만에 30만 명의 서명을 받는 등 놀라운 속도로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을 기해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및 헌법의 개폐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하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해 탄압하였다. 이후 YMCA회관에서는 민청학련 사건을 빌미로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4년 11월 27일, 범민주진영의 연대투쟁기구로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발족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