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기념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이 당시 시국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참고인으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이에 경찰은 서둘러 화장을 하고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으나, 다음날 15일 석간신문에 사망 보도기사가 나가자 단순 쇼크에 의한 사망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사체를 검안한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이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하자, 경찰은 1월 19일 물고문으로 인한 질식사로 정정 발표하고 고문에 가담한 경찰 2명을 구속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박종철의 연행 시간과 사망 경위, 고문에 가담한 경찰의 숫자 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에 가담한 경찰이 3명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3명의 경찰이 추가 구속되었으며 5월 29일에는 범인 축소 조작에 나섰던 박처원 치안감 등 4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되었다.

또한 박종철을 부검하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이 사건 발생 1년 후인 1988년 1월 12일 경찰이 자신을 회유하려했다고 폭로하면서 당시 치안본부장이었던 강민창이 직권남용과 직무유기혐의로 구속되었다.

2000년 12월에는 국가가 유족에게 지불한 손해배상금의 70%를 사건 가담 경찰이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고문이라는 잘못된 수사 관행에 대한 비판과 함께 경찰의 사건 은폐 등으로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 박종철기념관 설명 중에서 -

(이상 김종철, 2009,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희망세상>, 제76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7쪽 참조) 



박종철 기념관을 열며

87년 6월 10일! 오늘은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나 박종철 열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독재정권의 만행을 규탄하고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거리로 거리로 모여들던 날입니다.
그날부터 21년이 지난 지금 오늘도 명동성당과 서울시청 앞에서 국민의 생존권 사수를 위해 시민, 학생들이 모여 들고 있습니다.
세월은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 흘렀건만 우리의 정치 현실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박종철 열사가 20여 년 전 이곳에서 고문으로 죽어가면서도 그토록 바라던 민주화된 세상, 국민의 생존권이 보장되는 세상, 통일된 조국의 모습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이곳 <박종철 기념관>은 더 이상 좁은 유품 전시실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시민, 학생들이 열사가 죽음과 맞바꿔가면서 지키려고 했던 참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또한 열사가 그토록 갈망했던 인간다운 평등 세상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실천하는 살아 있는 역사의 산실입니다.

6월민주항쟁의 그 함성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합니다.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는 정부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6월항쟁의 교훈입니다.
지금도 살아 생생히 들려오는 열사의 외침이 있습니다.

사람다운 세상에서 자유로운 세상에서 통일된 조국에서 살고 싶다!


2008. 6. 10.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상 박종철기념관 개관 당시 배포된 유인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던 박종운을 잡기 위해서였다.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다가 14일 숨졌다.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책상을 “탁”치니“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며 발뺌을 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으로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 정부는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신민당은 정부 여당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였고, 재야단체들은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는 한편, 각계인사 6만 명으로 준비위원이 구성되어 2월 7일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2·7추모대회)를 개최하였다. 2월 19일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주최로 기독교회관에서 고문사례보고대회가 열렸다. 이에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미사에서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혔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사제단 성명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이 폭로로 서울지검은 6명을 추가 구속하였고, 정부는 치안감 등 주요 인사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경찰과 검찰의 사건은폐조작 시도는 정부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재야 진영은 5월 23일 ‘박종철군 국민추도준비위원회’를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준비위원회’로 확대개편하고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5월 27일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고 6·10대회를 박종철 사건 조작규탄 뿐 아니라 4·13조치의 철회 및 민주개헌쟁취로 초점을 맞췄다.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 은폐조작 및 호헌선언 반대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6월 9일의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과정에서 연세대학교 재학생인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 6월 10일 서울역 앞 광장에서 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로써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박종철은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으며, 그를 기리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2008년 6월 10일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숨진 현장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인권보호센터)에 박종철기념관이 개관되어 당시의 신문기사, 박종철 열사의 친필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모교인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동편에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한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2009년 6월 7일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인 결과, 당시 정부가 안기부, 내무부, 법무부, 청와대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최소 두 차례 열어 사건을 은폐·조작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김정남 저,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김윤영 저, 시대의 불꽃 시리즈『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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