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신민당사: YH사건

마포구 도화동 옛 신민당사 터 



YH사건의 배경

 제3차 경제개발계획(1972~1976)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고 외자도입과 경제규모의 확대를 계속 진전시켜 온 박정희정권은 제4차 경제계발계획기간(1977~1981)에도 수치상으로는 고도성장을 지속하고 있었으나, 1979년에 들어 그 성장도는 둔화되다가 1980년에 이르러서는 마이너스성장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도성장은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육성에 따른 외자도입과 해외건설경기의 호황, 수출금융에 따른 무제한의 통화량 증가가 그 주된 버팀목이었다. 따라서 1978년말 불어닥친 제2차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인플레의 압력에 휩싸이면서 불황에 접어들자 한국경제는 그 대외의존성, 경제구조의 취약성, 세계경기의 불황으로 인해 수출둔화가 나타나면서 급격한 인플레와 함께 불황국면에 빠지게 되었다. 때문에 실업률이 늘고 물가 또한 상승세가 고조되는 가운데 도산 기업이 속출하였고, 이는 중소기업에 더욱 심각한 타격을 주었는데, YH무역이 여기에 속한다. 

 
   YH노동자 신민당사 농성 강제해산 기사 

○ 1979년 초 가발업과 봉제업을 주업종으로 하는 YH무역은 은행부채와 경영적자를 이유로 폐업공고를 냈다. 그러나 폐업공고 훨씬 이전부터 YH무역은 사실상 폐업의 길을 가고 있었다. 1970년 창업주 장용호는 진동희를 공동소유자 및 사장으로 앉힌 다음 회사자금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YH의 제품을 수입․판매하는 것을 주사업으로 하는 ‘용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를 통해 장용호는 싼 가격과 후불조건으로 YH의 생산품을 수입․판매하면서 결제시한이 지나도 대금을 갚지 않는 방법으로 자기 자본을 회수하였다. 또 진동희는 장용호의 자본회수를 도와주는 대신 YH의 일부자본을 빼돌려 다른 회사를 차려 1976년 사장으로 옮겨갔다. 이 두 사람의 부정한 행위로 YH 무역은 날로 축소되어 갔다. 1970년 4천여명에 이르던 종업원이 1976년 말에는 1천 8백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진동희의 후임으로 들어앉은 대표이사 박정원과 재정관리 상무이사 김종혁(장용호의 매부) 역시 취임과 동시에 은행빚을 끌어들여 ‘오리온 전자‘를 인수하고 ‘새한 칼라‘의 주식을 44%나 매입, 회사의 재무구조를 의도적으로 악화시켰다. 그에 따라 경영적자는 급속히 증가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김종혁 등은 기계 등 회사의 자산을 사장의 결제도 없이 불법으로 빼돌려 치부하고 있었다. 1979년 급기야 은행부채가 40억을 넘어서자 은행부채의 증가를 폐업의 원인으로 내세운 것은 표면적으로는 하자가 없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폐업의 합법적 절차를 덧씌우기 위해 은행부채를 증가시킨 것이다. 
 
노동조합의 회사 정상화 노력과 좌절

○ 경영진의 부정한 행위로 YH무역의 경영상태는 급격히 약화되자, 경영부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노동조합은 경영문제에 대해 개입하게 된다. 1975년 결성된 YH노조는 회사가 해고, 전출, 회유, 매수, 어용노조 등의 방법을 통해 노조결성을 강력히 저지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적인 민주노조를 결성한 1970년대의 대표적인 민주노조였다. 

○ 1979년 초 YH노조는 서울시에 1979년도 임금인상 직권조정신청을 낸 뒤 임금인상노사협의회 소집을 요구하자 회사측은 3월 30일, 폐업공고로 답하였다. 이에 승복할 수 없었던 노조는 이 때부터 약 4개월 동안 회사와 부정한 대출을 남발한 조흥은행, 창업주 장용호를 소환할 권한을 가진 미국대사관, 담당관청인 노동청 그리고 대통령을 상대로 회사 정상화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노조의 요구를 묵살하는 한편, 오히려 노조의 힘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노동청의 거짓약속과 경찰의 농성장 급습과 폭행을 일삼았다. 마지막으로 노조는 회사를 처분할 시에는 고용승계를 보장했지만, 회사측은 이를 거부하고 8월 6일 폐업을 재공고하고 회사의 출입을 봉쇄하였다. 

노조의 신민당사 농성 : 사건의 정치쟁점화

[79.8.11] YH노동자 신민당사 농성(기자25시 사진인용)

○ 회사 정상화를 희망했던 노조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기숙사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하였고, 이에 회사측은 단전․단수 조치를 취했고, 경찰은 해산하지 않을 시에는 강제 진압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렇게 사태가 긴박해지자, 노조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와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등을 비롯한 종교, 인권 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시급한 문제는 경찰의 해산 위협에 따라 농성장을 옮기는 것과 노조의 힘만으로는 폐업을 저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사회적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최종 농성장으로 신민당사를 선택, 문동환 목사(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부회장), 고은 시인(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간사), 이문영 교수(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등 재야인사들을 통해 신민당 김영삼 총재에게 협조를 구하는 한편, 8월 9일 오전 9시 30분을 기해 2백여 명의 조합원이 신민당으로 옮겨갔다. 

○ 조합원들은 회사정상화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농성을 계속할 것을 결의, 신민당은 보사부장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하는 등 중재노력을 하였지만 정부와 경찰은 어떤 약속도 전제하지 않은 채 무조건 해산을 요구하였다. 이 때부터 YH 사태는 정부의 보도제재에도 불구하고 쟁점화되고, 이를 계기로 반유신투쟁의 힘을 모아가기 시작하자, 경찰은 8월 11일 새벽을 기해 ‘101호 작전‘이라는 명칭 아래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강제해산에 돌입하였다. 경찰의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의 과정에서 김경숙 노동자(당시 21세)가 목숨을 잃고, 조합원 대다수와 신민당에 남아 있던 30여 명의 신민당 당직자들과 국회의원, 그리고 기자들까지도 동맥이 끊기고, 코뼈가 부러지는 등의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사회적 파장 및 역사적 상징성 : 유신독재체제의 붕괴

○ 경찰의 폭력진압 과정에서 보여진 비인간적인 폭력성에 대해 각계에서 비난의 소리가 터져나오고,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8월 11일 의원총회를 소집 “정권의 말기적 발악”, “쿠데타”, “완전한 살인행위”, “16세기에나 있었던 일” 등의 극한적인 용어를 써가며 정부를 비난했고 미국무성도 이례적인 논평을 통해 “한국 경찰이 야당인 신민당사 내에서 노동자들이 벌이고 있던 농성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고 잔인한 폭력을 사용한 것을 개탄한다”고 밝혔다.   

○ YH사건은 1970년대 말이라는 시점에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고스란히 표출하여 종국에는 유신체제 붕괴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서의 의의가 크다 하겠다. YH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폐업이라는 YH회사 자체의 문제였으나, 이 사건이 YH회사-경찰-노동청-정권에 대(對) YH노조-재야-야당이라는 반대축이 순식간에 결집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이때 신민당사 농성의 강제해산은 이후 김영삼 총재 제명과 부마항쟁으로 가파르게 이어졌다. 

○ 한국정치사에서 1970년대는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 정치적으로는 민주적 절차와 과정이 무시되는 억압적이고 초헌법적인 권력이 행사되는 가운데 경제적으로는 외자를 도입하여 저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통제를 통해 재벌 중심의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한 시기였다. 따라서 다수 국민의 불만과 저항의 잠재성은 증가될 수밖에 없었고, 유신정권은 경찰과 중앙정보부 등 억압기구를 위주로 정치영역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체제 위협적 요소에 대한 적극적 탄압을 가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체제유지는 흥미로운 결과를 야기했는데, 정권 스스로가 모든 사회적 불안요소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사소한 사회영역에서 발생한 분쟁이 국가적 위기로 연결되기 쉬운 메커니즘을 유신체제 스스로가 안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회 내부에서 스스로의 불안요소를 해소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는 자생력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비정치적인 사회 내 위기 요소가 쉽게 정치적 위기로 전이됨으로써 근본적으로는 위기에 취약한 체제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요컨대 YH사건은 유신체제의 자본편중적이고 노동억압적인 성격으로부터 기인하여 유신체제의 반민주적 성격과 위기에 취약한 정치구조적 성격을 드러냄과 동시에, 본격적인 반유신세력의 결집을 매개하는 계기로 기능하였다. 그래서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이끌어내고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런 이유로 YH사건은 단순한 노사분쟁을 넘어 한국현대사의 한 장을 이루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의 한 획을 긋는 전기적 사건인 것이다.


관련자 명단

○ 김경숙(당시 21세. 노조 상무집행위원) 사망
○ 1979년 서울시경, YH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인명진(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실무목사 겸 총무), 문동환 목사(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 부회장), 서경석(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 총무), 이문영 교수(기독자교수협의회장), 고은 시인(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간사) 등 5명과, 농성을 주동한 최순영(노조 지부장), 이순주(부지부장), 박태연(사무장) 등 모두 8명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 섭외활동으로 당사에 없었던 부지부장 권순갑을 전국에 지명수배. 이들은 1979년 10․26사태 이후 긴급조치 위반자의 석방, 복권조치와 더불어 변호인단의 보석허가청구가 받아들여져 12월 10일 보석조치로 출감.


* YH사건의 일지(日誌)

1979년
 1월 초    노조, 서울시에 1979년도 임금인상 직권조정신청
 3월 30일  회사측의 폐업공고 
 8월  6일  회사측의 2차 폐업공고
 8월  9일  오전 9시 30분 YH노조 2백여 명, 신민당사 진입 및 농성 시작
 8월 11일  일명 ‘101 작전‘을 통해 폭력진압, 강제해산. 이 과정에서 YH 김경숙(당시 21세) 노동자 사망.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총회에서 “정권의 말기적 발악”, “쿠데타”, “완전한 살인행위”, “16세기에나 있었던 일” 등의 극한적인 용어를 써가며 정부를 비난. 미국무성, 이례적으로 논평을 통해 “한국 경찰이 야당인 신민당사 내에서 노동자들이 벌이고 있던 농성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고 잔인한 폭력을 사용한 것을 개탄한다”는 내용의 성명 발표.
10월  4일  국회, 신민당 김영삼 총재 제명안 변칙(날치기) 통과.
10월  6일  신민당 의원, 등원 거부 결의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통일당 의원 3명, 국회에 사퇴서 제출.
10월 15일  부마민중항쟁 발발(10월 2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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