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공단, 가리봉 5거리


1985년 구로연대파업

1) 구로공단․가리봉 5거리의 형성

○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1960, 70년대의 한국 산업화의 이면에는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시간,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폭압적인 노동 환경에서 일한 산업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후세대의 이른바 2세대 노동자들로 엄혹한 노동조건 내에서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평범하지만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진리를 분명히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히 진행된 수출주도 산업화로 자본과의 모순과 갈등이 증폭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을 통해 노동자로서 자신들의 인간다움을 확보하고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단결임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유신체제 등장 이후 확연해진 한국노총과 산별노조­특히 섬유노조­의 어용화, 준국가기구화는 이러한 인식을 한층 강화시켰다. 여기에 인권의 차원에서 노동문제에 접근하였던 교회의 지지, 후원이 결합되어 노동자들의 이러한 인식은 민주노조운동으로 현실화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청계피복노조 건설을 필두로 콘트롤데이타, 원풍모방, 반도패션, YH무역, 동일방직 등 민주노조가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 구로공단은 바로 이들 2세대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한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최초의 수출산업공단으로 60년대 말 구로동 일대에 조성된 제1단지에 이어 그 인접지인 가리봉동에 제2단지가 조성되었고, 이후 영등포 지역에 제3단지가 만들어져 현재와 같은 형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공단의 조성, 확장과 더불어 입주업체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각지에서 모여든 노동자들 또한 급증하였다. 노동자들은 수출목표를 초과달성하기 위해 밤낮 없이 잔업과 특근을 했다. 잠을 쫓기 위해 일명 "타이밍"을 먹고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면서 재봉틀을 돌리고 선반, 밀링작업을 하며 주어진 작업물량을 완수해야 했다. 수출목표 달성은 하나의 전쟁이었다. 

○ 하루의 전쟁이 끝나면 작업장에 딸린 다락방에서 혹은 공단 주변 빈민가의 쪽방에서 지치고 병든 몸을 달래야 했다. 이에 비하면 기숙사는 호텔이었지만 그것 또한 노동통제의 또 다른 공간이었다. 기숙사든 쪽방이든 거기에는 사생활도, 삶의 안락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다음 날 다시 재개될 생산력 배가 전투에 대비해 잠시 고단한 몸을 맡기는 곳에 불과했다. 생존을 위해, 혹은 배고픈 가족들을 위해 생존비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으며 노동할 뿐이었다. 그 대가로 이들은 근로자라는 보통명사에 수출역군, 산업전사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를 부여받았지만, 사회적으로는 "공돌이"`공순이"로 호명되었다. 노동자라는 이름을 빼앗긴 이들은 단지 "근로자의 날" 기념행사에 동원되거나 단체귀향을 위해 전세버스에 오르는 공단 노동자들의 모습을 방영하는 추석, 설날 등의 명절 때나 돼야 잠시 세인의 흥밋거리가 될 뿐이었다. 

2) 일어서는 노동자와 구로공단․가리봉 5거리

○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압살한 신군부가 한편으로는 기업별 노조로의 전환, 3자개입 금지 등 노동법의 개악을 통해, 그리고 다른 한편 "사회정화"라는 명목으로 민주노조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고 그 활동가들을 생산현장에서 배제, 탄압하자 노동자들은 잠시 숨을 죽였다. 사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전체가 신군부의 광기 어린 총소리와 유혈의 공포에 놀라 숨죽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70년대 민주노조들도 하나하나 각개격파되어 원풍모방 노동조합을 마지막으로 그 존재를 부정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신군부의 노동탄압이 "특별한 정치국면" 에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조직 이기주의에 지배되어 "우리 조합만은 괜찮겠지"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다른 민주노조들과 연대하여 파시스트 권력의 노동탄압에 적극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조합마저 공격 대상이 되는 상황을 자초하였다. 이를 깨닫고 저항하고자 했을 때 이미 거기에는 자신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저항의 결정체였던 민주노조는 없었다. 

○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여기에서 그냥 주저앉지 않았다. 각계에서 신군부 파시스트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고, 이것의 산물이었던 유화국면을 경과하며 노동자들 또한 자신들이 결코 깊이 잠들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그리고 현장의 밖에서 스스로를 투쟁을 통해 단련하면서 역사의 주체로 서고자 하였다. 그것은 전태일의 분신이나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보여 주었던 개별적인 운동방식을 단순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의식적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1985년 6월 대중투쟁을 통해 표출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구로공단을 한국노동운동의 상징적 공간으로 만든 구로연대파업이었다.

3) 아름다운 6일간의 만남 : 구로연대파업  

- [85.5] 구로연대투쟁 -
(출처미상 인용)

○ 구로연대파업은 전두환 정권 유화국면기인 1984년 자본의 전제에 맞서 노동자들이 새로이 건설한 민주노조들을 조직적 기반으로 하여 발생하였다. 유화국면 이후 1985년 2․12총선에서 패배하며 정치적 위기감에 사로잡힌 파시스트 권력은 노동운동 등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이 와중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구로연대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임금협상이 타결된 지 2개월이 지난 후 협상과정에서 발생했던 두 차례의 파업을 문제삼아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김준용 위원장과 노조 간부들을 회사가 고소, 6월 21~22일 경찰이 이들을 무차별 구속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주당 평균 70여 시간의 노동을 여름이면 20명에 한 대 꼴인 낡은 선풍기 아래서, 아무런 난방시설도 없는 혹한의 겨울에는 동상에 걸리기도 하며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고통스러운 노동을 감내해야 했던 노동자들에게 대우어패럴의 이러한 행태는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모습마저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 노조위원장이 연행되자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즉각 농성에 돌입하였고, 24일부터는 3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구속자 석방하라"대우어패럴 노조 간부들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던 6월 22일 저녁의 구로공단 내 민주노조 조합간부 합동노동3권 보장하라" "노동부장관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파업에 돌입하였다. 교육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여기에는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노조 간부들은 물론 구로지역의 해고자, 활동가들을 포함한 1백90여 명이 참석하였다. 그 결과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가 6월 24일 2시를 기해 연대파업에 들어가기로 하였으며 연대투쟁위원장에 효성물산 김영미 노조위원장이 선출되었다. 

○ 그렇다면 이렇게 신속하게 연대파업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단이라는 공간적 이점을 활용하여 평소 이들 노조들이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친선, 교류의 폭을 넓혀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각개격파식으로 파괴되어 나갔던 것에 대한 나름의 반성도 크게 작용했다. 이들은"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파괴 다음에는 우리 차례"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70년대 민주노조들처럼 "탄압의 차례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싸우자"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 구로공단은 순식간에 투쟁의 열기로 뒤덮였고,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이 마주 보고 있던 가리봉 5거리는 그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6월 25일에는 세진전자, 남성전기, 롬코리아 노조가 연대파업을 지지하는 농성에 합류하였고, 26일에는 효성과 청계피복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노동부 중부사무소를 점거하며 항의하였다. 28일에는 부흥사가 연대파업에 합류하였다. 이 시기에 가리봉 5거리와 공단 내 여기저기에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연대시위가 잇따랐고, 민통련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청계피복 등 여타 민주노조 등의 지지성명 발표와 농성이 이어졌다. 

4) 구로연대파업의 평가

○ 결국 6일간 진행된 이 연대파업투쟁은 29일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경찰과 구사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렇지만 이 기간에 가리봉 5거리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전태일의 외침을 온몸으로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노동자가 개별 존재로만 머물지 않는, 하나의 의미 있는 계급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더 이상 노동해방과 역사의 장에서 객체로 머물지 않을 것임을 주체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 구로공단의 가리봉 5거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울려 퍼진 노동자들의 외침은 그 투쟁 주체의 인식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한국노동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천여 명의 해고자와 구로공단 내 민주노조의 파괴로 이어진 이 연대투쟁은 성급한 연대파업으로 오히려 민주노조의 보루를 잃게 하여 결국 운동의 발전을 제약하였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에스콰이어 등의 노동조합 또한 연대파업 이후 무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연대투쟁에 대한 파시스트 권력과 자본의 기본적인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당시 노동자들의 이 이 "아름다운 투쟁"은, 파시스트 권력의 폭력과 일부 소수의 불순분자, 위장취업자의 조종을 받은 투쟁으로 몰고 간 관제언론의 왜곡으로 산산이 찢겨졌지만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눈물과 피를 통해 가장 귀중한 교훈을 몸으로 얻게 되었다. 그것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연대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 보존해 주는 유일한 길이라는 자명한 사실의 확인이었다. 

○ 구로연대투쟁은 `눈물겹고 아름다운 패배`를 통해 노동자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파시스트 권력과 자본의 실체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동안 경제투쟁에만 몰두해 왔던 노동운동이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촉진제가 되었다. 교육과 지도의 대상으로만 간주된 노동자들의 대중적인 연대투쟁은 당시 노동현장으로 대거 이전한 지식인 활동가들을 자극하여 노동운동의 방향전환을 유도하기도 했다. 바로 그 조직적 성과가 소그룹 서클주의와 경제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한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의 발족이었다. 

○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투쟁은 1985년 연대투쟁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1986년 봄에 이르러 더욱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협진양행, 삼경복장, 금성사, 대한광학, 나우정밀, 그리고 신흥정밀 등에서도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은 경찰과 관리자들이 파업을 막기 위해 식당에 진입하자 임금인상 등을 외치며 분신하였고, 결국 "우리도 배부르게 먹을 때가 있겠지"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 는 유언을 남긴 채 가족과 동료의 오열 속에 세상을 떠났다. 서노련은 3월 19일 가리봉 5거리의 모세미용실을 점거하여 노동자 박영진의 분신이 지니는 의미와 권력의 유혈적 노동탄압을 폭로하며 "생활임금쟁취"등을 요구하였다. 

○ 이처럼 `1985년의 구로연대투쟁`과 `1986년 박영진의 분신`, 그리고 `서노련의 모세미용실 점거` 등으로 상징되는 투쟁을 통해 구로공단은 파시스트 권력과 투쟁하는 비타협적 노동운동의 상징적 공간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구로공단, 특히 가리봉 5거리는 노동운동과 동일시되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보통명사로서의 위상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출처: 민주화운동 유적(지) 서울․경인 지역 조사․발굴작업 최종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