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리 4.19국립묘지

국립4.19민주묘지
4.19 혁명 다음 해인 1961년 2월 1일, 국무회의에서 수유리에 4.19 희생자들의 유해를 모실 공원묘지의 설립을 결의했고, 5.16 군사정변 이후 재건 국민운동 중앙본부가 부정 축재자의 재산인 서울 도봉구 수유동 산 9의 1 일대를 환수하여, 1962년 12월 21일 첫 삽을 뜨고 1만 2백 43평의 묘역을 가꾸어, 1963년 9월 20일, 185위의 희생자들을 안장했다. 이후 부상자 중의 사망자와 유공자 중의 사망자 115위가 추가되어 현재는 300위가 모셔져 있다. 주요 시설로는 유영봉안소, 기념탑과 분향소, 수호자 상, 기념비, 기념관등이 있다. 
 
□ 기관 소개 : http://419.mpva.go.kr
 
  1. 주소 : 서울시 강북구 한천로 180길 17
  2. 연락처 : (02)996-0419,  fax (02)996-0456
  3. 찾아가는 길
    가. 지하철    4호선 수유역 2번, 6번 출구에서 버스 이용
    나. 버스      (지선) 01, 1119, 1144, 1166, 1218 (간선) 101, 104, 109, 120, 144, 151, 170
  4. 개관
    가. 개방 시간 : 동절기 및 하절기 (06:00~18:00)
    나. 1회 수용 인원 : 80명
    다. 프로그램 : 4.19기념관 관람-희생 묘역 설명-기념탑-참배 등
    라. 특기 사항 : 참관 1일 전 예약 필수, 봉사활동 시간 인정(봉사활동 시)단체관람, 추모행사를 위한 장소사용을 원할 경우 행사 5일전까지 국립4.19민주묘지관리소에 신청 

□ 4.19혁명
 
  1.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
4.19혁명은 학생들과 시민이 함께 이루어 낸 반독재 민주 혁명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또한 향후 한국의 민주화가 이룩되는 데 있어서 밑바탕이 됐으며 통일운동 활성화의 계기가 됐다.
 
  2. 4.19 혁명의 발생 배경
마산 부정선거 항의 시위를 시작으로 4.19 혁명의 불꽃은 피어올랐다. 이승만의 장기 독재와 미국의 원조 감소로 인한 경제 불안으로 국민들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생각을 갖게 됐고 이에 불안한 자유당 정권은 3.15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시행에 옮겼다.
 
  3. 4.19 혁명의 전개 과정
    가. 3.15 의거      
       장기집권에 대한 불안을 느낀 자유당 정권이 부정선거를 벌이자 최초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3.15의거가 일어났으며 4월 11일에는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숨진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올라 다시 2차 시위가 일어났다.
    나. 4.19 혁명
       김주열군의 시신이 발견되자 국민들은 자유당 정권의 행위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4월 19일 전국에서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나게 됐는데 자유당 정권은 계엄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며 시위를 잠재우려 한다. 4월 25일에는 대학 교수단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거리로 나서게 된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을 사임하겠다”고 밝히며 하야한 후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다.
□ 관련 기관
  1. 4.19혁명희생자 유족회 [서울시 종로구 평동 소재]
  2. 4.19혁명공로자회 [서울시 종로구 평동 소재]
  3. 4.19혁명기념회관 [서울시 종로구 평동 소재]
    http://419revolution.org/
  4. 4.19혁명기념도서관 [서울시 종로구 평동 소재]

4.19국립묘지


<4월 학생 혁명탑 비문>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의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정의에 항쟁한 수 만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
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의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피어나리라.


<미아리 고개>

한성여중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진영숙(1946년 5월 15일~1960년 4월 19일) 양은 오후 10시 30분 미아리고개에서 시위 중 총탄에 희생된다. 같은 날, 해동상업학원 재학 중이던 김현기(20남)열사가 4월 19일 미아리고개 시위 중 총탄에 희생된다.

진영숙 양이 죽기 4시간 전에 어머니에게 쓴 유서같은 편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지금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희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수유리에 모셔져 있는 진영숙 열사의 묘 


방문인증 갤러리

분필을 든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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