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인권기념관 (옛 남영동 대공분실)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용산구 한강대로71길 37)에 자리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남산`으로 불리던 구 중앙정보부,`서빙고호텔`로 불리던 보안사령부 대공분실과 더불어 고문수사로 악명 높았던 곳이다. 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승격 독립하면서 대공분실에서 보안분실로 이름을 바꾼 `남영동 대공분실`의 공식명칭은 `경찰청 보안3과`이다. 공식명칭보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란 별칭이 훨씬 대중적인 이름이다. 홍제동에 있는 보안4과와 함께 보안경찰의 외근 부서 중 하나인 남영동 분실은 소위 `안보 위해 사범`을, 홍제동 분실은 `방첩` 분야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안보 위해 사범`이란 다름 아닌 시국사범, 즉 반독재 민주인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가 대간첩 수사를 명목으로 만들었다. 검은 벽돌로 지은 이 건물은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던 김수근에 의해 설계되었다. 김수근은 자신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인 공간 사옥과 같이 검은 벽돌로 이 건물을 건축했다. 그리고 창문 디자인에서 공간 사옥 창문 디자인과 닮은 점이 많다. 김수근은 5.16쿠데타 핵심이었던 김종필에 의해 스카웃되어 박정희 군사 정권과 전두환 군사정권에 걸쳐 많은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대표적인 것만 봐도 워커힐(1961), 자유센터와 타워호텔(1963), 세운상가(1966), 여의도종합개발 계획(1967), 올림픽주경기장(1977), 올림픽 체조, 사이클, 수영경기장(1984), 서울지방법원 청사(1984) 등이다. 미근동 경찰청사(전 치안본부, 1987)은 남영동 대공분실과 가장 가까운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 설계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다른 수사기관과 달리 조사실은 지하에 두지 않고 꼭대기 층인 5층에 두었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80년대 2개 층을 더 증축해서 후에 7층 건물이 되었다) 5층은 똑같은 구조의 `조사실`이 들어차 있는데 각 방은 4.09평 공간에 책상과 의자, 침대, 욕조, 변기가 설치되어 있다. 설치된 가구들은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각 방에 있는 창문이라고는 폭이 좁고 위아래로 긴 2개의 창문만 나 있어 비명소리가 새어나오기 어렵게 장치되어 있다. 국철을 타고 지나가면 창문 밖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전철 안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건물 안에서 얼마나 비일상적인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970~80년대 대표적인 고문기관으로 악명을 떨쳤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민주인권기념관(~2022년 개관)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2018년 12월 경찰청인권센터가 떠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18년 12월 15일 행안부로부터 관리권을 위임받아 민주인권기념관을 안정적으로 관리‧운영해 나가기로 했다.

민주인권기념관 웹사이트 https://dhrm.or.kr/     (* 방문(해설), 대관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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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던 박종운을 잡기 위해서였다.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다가 14일 숨졌다.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책상을 “탁”치니“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며 발뺌을 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으로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 정부는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신민당은 정부 여당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였고, 재야단체들은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는 한편, 각계인사 6만 명으로 준비위원이 구성되어 2월 7일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2·7추모대회)를 개최하였다. 2월 19일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주최로 기독교회관에서 고문사례보고대회가 열렸다. 이에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미사에서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혔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사제단 성명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이 폭로로 서울지검은 6명을 추가 구속하였고, 정부는 치안감 등 주요 인사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경찰과 검찰의 사건은폐조작 시도는 정부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재야 진영은 5월 23일 ‘박종철군 국민추도준비위원회’를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준비위원회’로 확대개편하고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5월 27일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고 6·10대회를 박종철 사건 조작규탄 뿐 아니라 4·13조치의 철회 및 민주개헌쟁취로 초점을 맞췄다.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 은폐조작 및 호헌선언 반대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6월 9일의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과정에서 연세대학교 재학생인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 6월 10일 서울역 앞 광장에서 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로써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박종철은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으며, 그를 기리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2008년 6월 10일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숨진 현장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인권보호센터)에 박종철기념관이 개관되어 당시의 신문기사, 박종철 열사의 친필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모교인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동편에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한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2009년 6월 7일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인 결과, 당시 정부가 안기부, 내무부, 법무부, 청와대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최소 두 차례 열어 사건을 은폐·조작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김정남 저,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김윤영 저, 시대의 불꽃 시리즈
『박종철』


* 김근태 민청련 전 의장 고문사건
(김근태 민청련 전 의장은 85년 9월 4일 오전 8시경 서부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가 풀려 나오다가 7~8명의 정사복 경찰에게 연행되어 시동이 걸린 포니자동차 뒷좌석으로 태워졌다. 왼쪽과 오른쪽에 한 명씩 앉았다. 한 명이 잠바를 벗어 김 전의장의 머리를 감싸고 눈이 보이지 않도록 한 채 머리를 짓눌렀다. 차는 30~40분 정도 달렸다. 차에서 내려서 잠바를 덮어 쓴 채 건물 입구 계단을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비좁게 느껴졌다. 5층, 15호실, 건물 왼쪽 맨 끝 방으로 끌려갔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매일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부터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중략)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마음 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 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성의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중략) 과연 인간이 한 인간의 고뇌와 죽음의 몸부림 앞에서 저렇게 냉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인간에 대한 신뢰가 산산이 부서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뤘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정 어린 말들을 주고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중략)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 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버티면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 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5년 12월 19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 의장 김근태 제1차 공판 기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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