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의회 본관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경성부민관 폭파 의거의 현장>

서울특별시의회 본관은 일제 강점기 때 경성부민관이었던 곳입니다. 1935년 12월에 완공된 경성부민관은 이름 그대로 경성부(서울) 사람들의 집회 장소로, 주로 정치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곳에서 소설가 이광수가 청년들에게 학병으로 나가라고 연설했고, 시인 모윤숙 역시 “나라에서 쫓겨나지 않는 며느리가 되자”며 부인들에게 전쟁에 참여할 것을 선동했습니다. 한마디로 경성부민관은 친일파의 정치 선동 무대였습니다.

1945년 7월 24일 대의당이라는 친일 단체가 주최한 아세아(亞細亞)민족분격대회가 열렸습니다. 박춘금을 중심으로 모인 친일파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에서, 제국주의 일본을 위해 아시아 민족이 전쟁터로 나아가야 한다고 민중을 선동했습니다. 그런데 박춘금의 강연이 끝나자 갑자기 폭탄 두 개가 연달아 터졌습니다. 그 결과 대의당의 당원 한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습니다. 훗날 이 사건은 청년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이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한 의거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앞의 표석은 그날의 의거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입니다. 


<4․19 혁명의 현장>

그 후 이 건물은 1954년부터 1975년에 여의도로 옮겨 가기 전까지 국회 의사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 처리한 사사오입 개헌(1954년)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안들이 이곳에서 결정되었습니다.

1960년 4월 18일, 이곳은 고려대 시위의 집결지였습니다. 4월 18일 오후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은 교문을 나와 국회 의사당으로 향했습니다. 경찰의 진압으로 많은 학생이 연행되고 시위 대열이 흩어졌지만, 천여 명의 학생들은 국회 의사당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국회 의사당 앞에 앉아 “연행된 학생들을 석방하라”, “부정선거에 대해 해명하라”며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국회 앞 연좌 농성은 국내외 보도진과 시민들의 눈길을 한데 모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연행된 학생들이 전원 석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제야 학생들은 농성을 풀고 을지로로 향했습니다. 

4월 25일 대학 교수들이 향한 곳도 이곳, 국회 의사당이었습니다. 교수들은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시국 선언문을 낭독한 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교수들은 국회 의사당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시국 선언문을 다시 한 번 낭독한 후 만세 세 번과 애국가를 부른 뒤 해산했습니다.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125

 

부민관 폭파 의거 터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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