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의회 청사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 이유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똥이나 쳐 먹어, 이 새끼들아!”

1966년 9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지고 있었다.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를 밀수한 사실이 드러나 국회의원들이 정일권 국무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 국무위원들을 불러놓고 대정부 질문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제6대 국회의원 김두한(김영철 분)이 대정부질문을 하다 말고 갑자기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정 총리 등 국무위원들을 향해 준비해온 오물을 쏟아 부었다. 장내는 일순간 아수라장이 됐고, 이 모습은 슬로모션으로 클로즈업됐다. 지난 2002년 시청률 50%대를 넘나들며 ‘긴또깡 신드롬’을 몰고 왔던 SBS드라마 <야인시대>의 첫 회 내용이다.

당시 ‘낭만파 주먹’으로 이름 높던 김두한이 “나라 재산을 도적질해 먹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벌”이라며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투척했던 곳은 국회 본회의장. 그런데 당시 국회의사당이 여의도에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원조’ 국회의사당은 태평로에 있다.

2002년 월드컵은 서울시청 앞 광장의 진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효순이․미선이 추모 촛불집회도 그렇거니와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려대 학생들의 4․18시위와 1987년 6.10민주항쟁과 이후 광우병집회, 2016-2017년의 박근혜 탄핵 집회까지, 서울광장은 민의 표출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고 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이곳이 지닌 ‘정치적 상징성’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세종로 광화문에서부터 태평로 서울시청까지의 일직선 도로 인근은 경복궁과 덕수궁 등 과거 권력은 물론, 입법․행정․사법의 3부 기관과 4부라 일컬어지는 언론까지 현대 한국사회의 파워란 파워는 모두 집중돼 있는 공간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4강의 대사관도 하나 같이 이 권력의 동네에 몰려 있어 국내는 물론 국제 권력의 메카이기도 하다.

그런데 ‘행정’이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와 청와대를, ‘사법’은 정동에 있던 대법원을 가리킨다지만 입법기구까지 있었다니? ‘국회’하면 으레 여의도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1975년까지만 해도 국회는 태평로에 있었다. 프레스센터 맞은편, 즉 영국대사관과 코리아나호텔 사이에 있는 서울시의회 청사가 바로 그곳이다. 주변 빌딩에 비해 층수도 낮고 모양새도 세련되지 않아 지나다닐 때마다 오히려 한 번 더 쳐다보게 되는 이 건물은, 알고 보면 다이내믹한 한국사의 영욕이 점철된 곳 중 하나다.

해방 이후부터 1975년 8월 국회가 여의도 새 국회의사당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근 25년 동안 국회 건물로 이용됐던 서울시의회 청사. 당시 이곳에서는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만한 각종 사안들이 논의, 결정됐다.

이를 테면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1954년)이 이뤄진 곳이자, 일본 전시형법을 참고해 “인심을 혼란케 하여 적을 이롭게 한 자는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을 추가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날치기 통과(1958년)된 현장이다. 또 5․16군사쿠데타 때는 국회 간판을 떼고 ‘재건국민운동본부’(1961년)가 차려졌고,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에는 한일협정비준파동(1965년)과 3선개헌파동(1969년), 국가보위법파동(1971년) 등 숱한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다.


해방 한 달 전 터진 부민관 폭파사건

서울시의회 청사를 돌아보다 보면 입구 앞에 이렇게 새겨진 표지석 한 기가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 터 - 1945년 7월 24일 애국 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해방 후 국회로 쓰였던 이 건물이 세워진 것은 지난 1935년 12월 ‘부민관(府民館)’이라는 이름으로였다. 당시 서울의 전력사업을 독점하고 있던 경성전기가 ‘독점 용인’을 조건으로 낸 50만 원을 밑천으로,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위패를 봉안한 덕안궁 터에 지은 것이다. 이름과 같이 경성부(府) 사람들(民)을 위한 문화공연장을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5천6백여 제곱미터에 대강당과 식당을 비롯해 환기와 방화시설까지 갖춘 당시로서는 최신식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곳에서 행해진 것은 문화행사가 아니라 정치집회가 적잖았다. 모윤숙이 이곳에서 열린 ‘결전부인대회’에서 “우리는 남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가슴에 대화혼(大和魂)의 무형(無形)한 총검(銃劍)을 가져야겠습니다. 가문에서 쫓겨나더라도 나라에서 쫓겨나지 않는 며느리가 됩시다”라며 부녀자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춘원 이광수 역시 청년들을 상대로 학병 권유 연설을 하는 등 전쟁 말기의 부민관은 ‘과잉 친일의 장’으로서 기능했다.

1945년 7월 24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부민관에서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색출에 힘쓴 공로로 일본 중의원에까지 오른 대표적 친일부역자 박춘금이 만든 친일단체 ‘대의당(大義黨)’이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憤激)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행사에는 조선의 친일 인사들 뿐만 아니라 일제 관리와 군인, 중국과 만주의 친일인사들까지 참석했다.

부민관에 모인 한중일의 친일 인사들은 <매일신보> 사장 이성근의 개회사와 박춘금의 ‘아시아민족의 해방’ 강연을 듣고, ‘남녀청년분격웅변대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음과 함께 강당 안이 아수라장이 됐다. 19살 청년 조문기와 류만수, 강윤국 등이 설치한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것이다. 대의당 당원 1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수십 명이 다쳤다. ‘분격’의 사전적 의미가 “매우 노엽고 분하여 크게 성을 낸다”는 뜻인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대회를 연 친일부역자 자신들이 그 화를 다 뒤집어쓴 꼴이 됐다.

“친일파를 위한 광복, 친일파를 위한 해방”

1945년 7월 24일이면 해방되기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때이니, 일제의 조선 지배가 시작된 지 35년이 다 됐을 때다. 애초 항일운동에 가담했던 이들이 하나둘 전향을 시작한 지 이미 오래이고, 일반인 대부분은 일제의 지배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1945년의 한국. 그런데 그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이, 그것도 국내에서까지 계속되고 있었다니!

당시 이 사건을 주도했던 조문기(79)씨는 2008년 작고할 때까지 오랜 세월 일제잔재 청산에 주력해 왔다.

“광복절 광복절 하지만 광복은 무슨 광복이야. 결국 해방된 건 우리 민족이 아니라 친일파야. 일제라는 상전이 떠나가고 친일파가 상전이 된 거지. 친일파를 위한 광복, 친일파를 위한 해방일 뿐이야.”

지난 2003년 광복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사건 현장이었던 서울시의회 청사 뒤쪽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조 이사장은 “친일파 또는 그의 후예인 역대 정권이 ‘단상’에서 주는 독립운동 관련 상(賞)을 ‘단하’에서 받기 싫어 지금까지 광복절이나 삼일절 행사에는 일절 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도 청와대 만찬에 초청받았지만 나가지 않았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대통령과 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 그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반대’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난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분열되고 난맥을 보이는 것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무슨 개혁을 하려고 해도 사사건건 방해를 하고.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에도 굴종과 굴욕의 길을 걸어온 근본 원인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친일 경력을 가진 자들이 자손과 후학을 양성해 맥을 이어오면서 오욕의 역사가 정착돼버린 거지. 일제잔재는 말로만 청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일제에 부역한 박정희를 기리는 기념관을 만들자는 나라가 제대로 된 건가?”


초라한 서울시의회 청사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 이유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부민을 위한 문화공연장으로 세워졌지만 실제로는 일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각종 정치집회 장소로 전락했던 부민관. ‘예술의 공간’으로 시작한 운명이었지만 그것은 허울이었고 본모습은 ‘정치 집회장’이었다. 해방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사령부나 국립극장으로 이용된 적이 있긴 하지만,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면서부터 국회의사당이 들어온 것이다.

물론 1975년 8월 국회가 여의도로 둥지를 옮길 때, 세종문화회관의 별관으로 쓰이게 되면서 성격을 달리할 뻔도 했다. 그러나 70년대 관이 주도해 만든 ‘문화예술의 전당’이라는 것이 시민들의 문화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는 관의 욕망을 채우는 데 충실했기에,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쓰였다한들 부민관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었을까 싶다.

결국 지방자치제가 확대 실시되면서 세종문화회관 별관은 얼마 안 있어 다시 서울시의회라는 정치입법기구로 주인이 바뀌었다. 결국 문화시설(부민관)에서 시작해 정치입법시설(국회의사당)로, 거기서 다시 문화시설(세종문화회관 별관)로 바뀌었다가 정치입법시설(서울시의회)로 되돌아온 부민관. 이 건물의 ‘정치적 운명’은 해방 뒤에도 그대로 이어진 셈이다.

부민관으로 출발한 현 서울시의회 청사는 1980년 태평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원래 건물의 대부분이 헐렸고, 85년 국회 제3별관을 헐면서 지금 보이는 것처럼 목욕탕 굴뚝같은 첨탑과 성냥갑처럼 어색한 건물만 남게 됐다. 사람들은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싶을 때 그 경험의 장소를 찾는다. 그 공간의 이야기를 음미하며 잊고 지냈던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다. 장소는 기억을 지배하고, 기억은 의식을 지배한다. 영욕의 한국사가 밀도 높게 압축되어 있는 곳, 초라한 서울시의회 청사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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