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은 서울 출신으로 보성 중·고교를 졸업하고 1968년 서울대에 입학했다. 1975년 4월 11일, 농대 교정에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자결했으며 다음날인 12일 오전 8시 55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 도중 운명했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은 두 권의 책, 『긴 겨울 얼음 뚫고』(김상진기념사업회, 녹두 발행, 1995)와 시대의 불꽃 『김상진』(김남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행, 2003)에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사건 당일을 전후한 김상진의 심경과 행보에 대해서는 이병호 통일농수산사업단 이사(서울대 75학번, 50세)와 안종건 방송통신대 교수(서울대 68학번, 56세)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양재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병호 이사는 개성공단 내 양돈장 설치를 위해 북한 방문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기꺼이 취재에 응해주었다. “민주화 세력들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생산적인 사업을 추진하고 사회변화의 동력이 되는 것이 청년 김상진의 죽음을 빛바래게 하지 않고 계승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이병호 이사는 남북한 사이에 교류 중인 농기계와 농법, 농업 육성제도 등에 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생명을 던져 부끄러움을 알리다. 중국인들은 의로움(義)에 대해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는 말을 쓴다. 의롭다 함은 흔히들 분노할 줄 아는 마음만을 연상하기 쉬운데 실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일컫는다. 당시 박정희의 유신헌법에 찬성표를 던진 한국 국민은 91%를 넘었다. 총칼과 군홧발의 위용 아래 숨죽인 채 엎드려 서로의 비굴한 양심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던 것이 30년 전 이 나라 백성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김상진은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쿠데타군부의 유신독재체제를 향해 항거했지만, 기실 그것은 불의에 분노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일깨운 희생이었다. 그가 죽음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 네차예프는 과연 누구일까? 김상진 자신인가, 그의 죽음을 예견하고도 막지 못했던 서울대의 지성들인가, 쿠데타 범죄자 박정희인가, 아니면 일신의 안위를 위해 침묵한 채 엎드려 있던 한국의 국민들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