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자리였죠. 학생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김상진 형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과 <양심선언문>을 읽은 뒤 준비한 과도를 꺼내들고 자결을 결행했어요. 당시엔 이 뒤편에 백양나무가 서있었는데…….”
김원일 사무국장은 표석 뒤에서 마치 누군가 쉴 수 있도록 일부러 그러고 있기라도 한 듯 팔을 벌려 표석 위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선 느티나무를 가리켰다.

“학생들은 도서관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형이 자결한 이 잔디밭을 돌아 교문 밖 수원 시내로 진출하곤 했죠. 근래에 매각이 확정된 부지는 캠퍼스 반쪽 정도여서 이 공간은 그대로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수원캠퍼스의 관악 이전과 함께 당시 사건을 증명하고 보전해줄 표식들은 하나 둘 관악으로 옮겨졌지만, 기념사업회 측은 의거 현장의 의미에 주목해 표석이 있는 곳에 기념조형물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알려줬다.
 
이 사업은 현재 <임옥상미술연구소>에 위탁해 추진되고 있다.

청년, 김상진 
김상진은 서울 출신으로 보성 중·고교를 졸업하고 1968년 서울대에 입학했다. 1975년 4월 11일, 농대 교정에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자결했으며 다음날인 12일 오전 8시 55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 도중 운명했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은 두 권의 책, 『긴 겨울 얼음 뚫고』(김상진기념사업회, 녹두 발행, 1995)와 시대의 불꽃 『김상진』(김남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행, 2003)에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사건 당일을 전후한 김상진의 심경과 행보에 대해서는 이병호 통일농수산사업단 이사(서울대 75학번, 50세)와 안종건 방송통신대 교수(서울대 68학번, 56세)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양재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병호 이사는 개성공단 내 양돈장 설치를 위해 북한 방문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기꺼이 취재에 응해주었다.
“민주화 세력들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생산적인 사업을 추진하고 사회변화의 동력이 되는 것이 청년 김상진의 죽음을 빛바래게 하지 않고 계승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이병호 이사는 남북한 사이에 교류 중인 농기계와 농법, 농업 육성제도 등에 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하공정맥(하대정맥) 절단이라는 거야.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완치를 장담했는데 수술이 끝나고 만 하루가 지나도록 수혈이 계속되더라고. 환자를 돌려 눕히고서야 피가 새고 있다는 걸 알았지.”

김상진은 결국 서울대병원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세인의 애도에 뒤이을 거국적 반발을 우려한 박정희 정권은 김상진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해버렸고, 곧이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서울대생들은 고인 사망 후 40일 만인 5월 22일, 관악캠퍼스에서 시신 없는 장례식을 거행하며 경찰과 충돌한다. 학생운동사에서 속칭 ‘오둘둘 사건’으로 불리는 이 대규모 시위로 80여 명의 서울대생이 서울 남부경찰서로 연행된 가운데 김근태, 박원순을 비롯한 20여 명의 학생이 긴급 수배되었고, 56명의 학생이 구속되었다.

필자는 젊은 김상진의 꿈과 사랑에 대해 더 들어보길 원했지만 안 교수는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세상의 발가벗은 시선으로부터 고인이 된 친구의 인격을 지켜주려는 뜻을 더 거슬러서는 안 되리라 싶었다.

생명을 던져 부끄러움을 알리다. 
중국인들은 의로움(義)에 대해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는 말을 쓴다. 의롭다 함은 흔히들 분노할 줄 아는 마음만을 연상하기 쉬운데 실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일컫는다. 당시 박정희의 유신헌법에 찬성표를 던진 한국 국민은 91%를 넘었다. 총칼과 군홧발의 위용 아래 숨죽인 채 엎드려 서로의 비굴한 양심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던 것이 30년 전 이 나라 백성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김상진은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쿠데타군부의 유신독재체제를 향해 항거했지만, 기실 그것은 불의에 분노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일깨운 희생이었다. 그가 죽음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 네차예프는 과연 누구일까? 김상진 자신인가, 그의 죽음을 예견하고도 막지 못했던 서울대의 지성들인가, 쿠데타 범죄자 박정희인가, 아니면 일신의 안위를 위해 침묵한 채 엎드려 있던 한국의 국민들인가.

관련 탐방지